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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신 교수[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본문

강사님과/스타강사/유명강사

김홍신 교수[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파인드강사 2013. 2. 7. 17:28

 

 

강사섭외/기업특강/명사섭외/유명인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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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국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

김홍신 교수, 소설가

2010~ 동서커피문학상 운영위원회 위원장

2008~ 건국대 언론홍보대학원 석좌교수

2005~ 평화재단 이사

2004~ 시민운동지원기금 이사

2004~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이사

1996~2003 제15대, 제16대 국회의원

1988 건국대학교 국문학 강사

1974 월간 새빛 편집장

2007 제4회 통일문화대상

2003 국정감사 NGO 모니터단 국정감사 우수의원상

2003 한국유권자운동연합 의정활동 최우수상

2002 한국유권자운동연합 의정활동 대상

2001 제1회 자랑스러운 한국인 대상

1987 제6회 소설문학작품상

1986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

 

 

 

 

 

 

■ 김홍신은 누구

1947년 3월 19일 충남 공주 태생. 논산에서 성장하였으며, 건국대 국문과 및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1976년 『현대문학』에 「본전댁」 등으로 추천 완료되어 문단에 등단하였다. 주요작품집으로는 『해방영장』(1980), 『수녀와 늑대』(1983), 『난장판』(1982), 『또 다른 늪』(1983), 『우리들의 고해성사』(1984), 『걸신』(1985), 『내륙풍』(1987), 『갈등 그리고 또 갈등』(1987), 『벌거숭이들』(1989), 『대발해』(2007) 등이 있으며, 콩트집으로는 『도둑놈과 도둑님』(1980), 「요즘 윗분들」(1987) 등이 있다 1986년 제12회 한국소설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인간시장』(1981~1989)으로 대표되는 그의 작품은 일상적인 소재를 배경으로 하여 담백한 백성, 소외된 소시민들을 주인공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욕망과 꿈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작품을 통해 독자로 하여금 불확실한 미래를 희망적으로 바라보게 하는 태도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들에 대해 깊이 천착하기보다는 한편의 활극을 보는 듯한 재미만을 추구하면서 대중의 흥미를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그에 영합하고 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였다. 1990년대 초부터 정계에 진출하여 15‧16대 국회위원을 지냈다.

 

 

 

<김홍신의 관련 기사 보러가기 Click>

 

 

 

 

[힐링인터뷰] 독고다이 김홍신, 그게 뭐 어쨌다고

 

 

뚜: 참고로 교장 선생님 훈시 모드로 임하면 바로 녹음기 끄겠습니다. (웃음) 먼저 요즘 근황이 어떠신지요?

김: 일 년에 평균 150회의 강연을 하고 있어요. 그전에는 요청하는 쪽에서 주제를 정해줬는데 요즘은 마음 다스림에 대한 강연을 많이 해달라고 해요. 사람들이 그런 쪽에 아주 관심이 많다는 뜻이죠. 우리가 눈에 보이는 쓰레기는 잘 버리면서 마음의 쓰레기는 안 버리잖아요. 근심, 걱정, 화, 분노 이런 것이 다 마음의 쓰레기죠.

뚜: 불교에서는 그걸 버리면 해탈을 한다고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겠습니까.

김: 어렵죠. 그래서 살면서 훈련이 필요한 거죠.

뚜: 어떤 식으로 훈련을 하십니까?

김: 내 소관이 아닌 것에 연연하려 하지 않으려 합니다. 천장이 새서 서재의 책이 다 젖을 것 같아도 내가 지금 어쩔 수 있는 일이 아니라면 잠을 자려 합니다. 식탁 앞에도 ‘이 음식이 내 앞에 오기까지 수고해주신 분들에게 감사합니다.’ 라는 문구를 적어놔요.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자꾸 말하고, 적고, 꺼내놔야 훈련이 되는 거죠.

 

뚜: 데뷔를 76년 현대 문학으로 하셨죠? 데뷔하고 나니 좀 나아지던가요?

김: 더 고통스러웠어요. 학벌 좋은 친구들은 잡지나 신문사에 선배들이 다 깔려있어요. 근데 건국대는 문학의 불모지였죠. 잡지사, 언론사에 네트워크가 하나도 없어. 데뷔는 했는데, 사하라 사막 어디에 딱 떨어진 그런 느낌. 생계 대책도 없고 번듯한 책상 하나 없었어요.

뚜: 인간시장이 터진 것이 81년이죠? 선생님 나이 34살 때네요.

김: 81년 가을이죠. 그런데 대한민국 최초의 밀리언셀러 작가로 기록되었는데 또 고통스러웠어요. 늘 초조하고 불안한 삶이었죠. 협박, 공갈이 매일 계속 되었습니다. 집안에 협박편지를 묶어서 돌멩이를 던지고, 게다가 가족을 대상으로 협박을 할 때는 견디기 어려웠죠. 아이들은 지금도 그때를 생생히 기억해요. “애들 잡아다 처참하게 죽인다.” 와 같은 협박들이요.

뚜: ‘인간시장은 문학이 아니라 무협지다!’ 라는 비난도 꽤 많았던 것으로 아는데 이른바 통속소설의 원조라 하면 최인호 선생 아닙니까?

김: 그렇죠. 나도 문학하는 친구들과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을 엄청 욕했었어요. 이게 무슨 소설이냐, 돈 벌어서 뭐 하겠다는 거냐, 이러면서 욕을 했죠. 순수문학에 대한 집착이기도 했고요. 그러다 내가 유명해져서 인호 형과 제가 문학심사위원으로 만난거에요.

뚜: 등 뒤에서 욕을 퍼부었던 대선배를 딱 만난거네요?

김: 양심이 찔려 못 견디겠더라고요. 점심때 말했어요. ‘내가 선배를 강력히 비난했다. 문학적 비판도 아니고 그냥 비난이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 상황이다. 선배의 마음은 그때 어떠했겠나. 내가 선배한테 고백을 해야 오후에도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랬더니 인호 형이 씩 웃더니 내 어깨를 끌어안더라고요. 그러더니 ‘당신이 최인호를 비판했으니 오늘의 김홍신이 있지. 내가 다 겪은 거요. 나한테 그렇게 고백해준 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요.’

역시 최인호더군요. 그 이후 우리는 평생 형제처럼 지내고 있어요. 작년 봄에는 여수 공항에서 우연히 만났는데 내 볼에 뽀뽀를 하더니 사랑해하고 가는거에요. 눈물이 흘러서 미치는 줄 알았다니까. 건강 찾아서 좋은 글 쓰게 해달라고 빌었어요.

 

 

뚜: 국회의원으로도 맹활약을 하셨습니다. 특히 당의 입장에서는 통제가 되지 않는 국회의원으로도 유명했는데요. 의원 시절의 좌충우돌했던 이야기 잠깐 해보죠.

김: 대변인을 할 때는 단 한 번도 총재 집을 안 갔어요. 원래 매일 일찍 총재 집에 가서 워딩을 받아와야 해요. 연말과 연초에 총재 집 세배하러 가면 대변인이 전체 진행을 하는데 나는 그 시간에 설악산 대청봉에 있었어요. 나는 공보비서가 아니라 당대변인인데, 할 말이 있으면 총재가 당에 와서 하면 되잖아요? (웃음)

뚜: 그 때문에 8년간 언론, 시민단체 등이 실시한 모든 조사에서 의정활동 1등을 한 것이고요?

김: 국정감사 1위, 의회 참석률도 1위였죠. 결정적으로 한나라당에서 쫓겨난 것이 유시민이 출마를 앞두고 출판기념회를 하는데, 제가 축사를 하게 된 거였어요. 우리 당이랑 붙는 사람에게, 꼭 당선되어야 한다고 축사를 한거에요. 당에서 난리가 났죠. 그때 내가 그랬어요. 여보시오, 주례사든 축사든 당연히 칭찬을 하는 거지, 그럼 당선되지 말라고 하느냐. (웃음)

뚜: 현 정권에서 사는 국민들의 정서는 어떻다고 보십니까?

김: 옛날 영화중에 ‘늑대와 춤을’ 이라는 인디언 영화가 있었어요. 거기 보면 인디언들 이름이 재미있어요. “ 늑대와 춤을”, “주먹 쥐고 일어서” 이런 식의 이름이잖아요. 지금 우리 국민들은 “주먹 쥐고 꼬나봐” 그런 상태가 되어 있어요. 제가 전국에 강연을 다니고, 택시나 비행기, 고속철도도 자주 타는데 거기서 만나는 서민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다들 주먹 쥐고 꼬나보고 있어요.

 

뚜: 요즘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나요?

김: 사랑이야기입니다. 쓰면서도 진저리를 칠만큼 몸이 화끈거리는 사랑이야기를 쓰고 싶어요.

뚜: 문학가로서 김홍신의 콤플렉스는 뭔가요?

김: 하나는 문학수업을 제대로 못 한거에요. 학부 때 글 잘 쓴다는 인정을 받고 나니 시건방져지고 겉멋에 들어버린 거죠. 또 하나는 인간시장으로 워낙 벼락 스타가 되니까 원고청탁이 엄청나게 들어오잖아요. 근데 그때 정말 절제를 했었어야 했어요.

뚜 : 독고다이로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들다면 집단 속으로 들어가면 어느 정도 덜 힘들어지지 않습니까? 타협하면 사는 것도 더 편해지는 거죠. 외줄을 타면서 내려와서 쉬고 싶은 욕구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김: 맞아요. 어떨 때는 타협이라고 생각하지 말자. 외줄에서 내려와서 내 편도 만들고 그들과 같이 걸어가면 좀 편할 거라는 생각 많이 했어요. 근데 그렇게 해서 내 색깔을 지우고 싶지 않았어요. 죽어도 김홍신이라는 존재로 살고 싶은 거죠. 내가 모자라서 줄에서 떨어지지 않는 이상은 내 발로 내려올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거죠. 그리고 세상에는 독고다이로 살면서 근사하게 사는 분들도 꽤 많아요. 그런 분들 생각하면서 위로 받아요.

 

<김홍신의 힐링 인터뷰 보러가기 → Click>

 

 

김홍신 교수는 글을 쓰는 일 뿐만 아니라 국회 의정활동에도 참여하였으며, 최근에는 활발하게 강연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TV에도 자주 출연하여 얼굴을 알렸다.

 

 

 

김홍신님을 섭외하시려면 070-4351-4752로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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