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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성우 배한성 -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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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한성 (성우)
경력
2012.05 한국관광 명예 홍보대사
2011.09 한국실명예방재단 홍보대사
기아대책 홍보대사
2011.04 경기국제항공전 홍보대사
서울예술대학 방송영상과 겸임교수
한국성우협회 자문위원
2009 인천세계도시축전 명예 홍보대사
2006.12 산업안전 홍보대사
2004 한국성우협회 이사장
수상
2011 MBC 방송연예대상 라디오부문 공로상
2010 대한민국 대중문화예술상 국무총리 표창
1985 KBS 최우수 남자 성우상
42년 베테랑 성우 배한성의 재발견
“부잣집 아들 아닌 게 행운이었다”
도대체 마음 놓고 인터뷰하기가 미안하고 불안하다. 다음 일정부터 알고 싶다.
저녁에 결혼식이 있고 밤에는 행사 일로 지방에 내려가 내일 상경한다. 그저 바쁜 척하고 사는 것이니 이해해 달라. 하하하.
바쁘다는 것은 돈도 잘 번다는 얘기가 아닌가? 지금 고정적으로 하고 있는 일은?
먼저 솔직히 밝히겠다. 난 돈에 욕심이 없다. 일이 좋아서 뛴다. 내가 하는 일중에는 돈 안되는 일도 무지 많다. 돈을 밝히는 사람으로 손가락질 받는 게 제일 싫다. 서울예대 강의도 의미가 있어서 애써 시간을 낸다. 주로 지금 하고 있는 일은 KBS-1TV <아침마당>, 경인방송 <더 오피스>와 각종 애니메이션 작품의 더빙, 주식회사 솔로몬의 아트디렉터, 그리고 여기저기서 스피치와 관련한 강연 초청이 많다.
가장 궁금한 것부터 묻겠다. 그토록 오래 인기를 유지하며 일할 수 있는 비결이 무엇인가?
나는 언제나 매니저 없이 혼자 뛴다. 출연하기 위해 로비를 하거나 누굴 통해 부탁도 못한다. 실력으로 버티며 산다. 그러나 내가 발견한 것은 세상이 바뀌고 시대가 변할 때 나도 변해야 산다는 원칙이다. 시대가 필요로 하는 실력과 기능으로 승부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라디오 성우시대가 저물면서 음악프로 진행자로 옮겨갔고 이어서 쏟아져 나오는 TV 외화프로 성우로 본업을 살리며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확인했다.
기억이 생생하다. 인기 프로였던 <형사 콜롬보>의 목소리, <맥가이버> <형사 가제트> 등에서 당신의 목소리는 명품이었다.
지금도 더스틴 호프만, 로빈 윌리엄스, 로버트 레드포드, 알파치노 등 애니메이션이나 외화 프로에서 그들 목소리는 나의 차지다. 목소리 연기는 나이가 드러나지 않으니 언제나 젊게 남아 있을 수 있어서 행복하다.
‘시대가 변하면 나도 변해야 산다’는 말은 명언이다. 성우들이 연예계 최고의 스타로 군림하던 라디오 전성기에서 탤런트들이 인기의 전면에 나온 디지털 TV시대까지 당신의 설 자리를 잃지 않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듣고 싶다.
라디오 드라마가 안방극장에 묻혀버릴 무렵에도 음악프로는 인기가 높았다. 내가 TBC(현재의 KBS-2TV) 성우시절인 1978년 음악프로의 배동순 PD가 음악프로 <밤하늘의 멜로디> DJ를 찾고 있는 중에 작가 한 사람이 성우가 진행하면 어떠냐고 제안하자 즉석에서 그 아이디어 괜찮다며 나를 기용했다. 그 프로의 인기를 업고 한동안 음악프로 진행자로 분주하게 보냈다. 이어서 TV들이 수입 드라마로 붐을 탈 때 직업 성우의 할 일이 많아졌고, 컬러 TV의 등장과 함께 다양한 프로그램의 TV전성기가 열리면서 TV 진행자로 자연스럽게 옮겨갔다. 초기부터 <퀴즈 올림픽> <풍물기행> <문화칼럼> 등 교양 예능프로에서 인정을 받아 지금껏 먹고 산다.
언젠가는 소형 승합차를 몰고 유라시아를 횡단하는 기행프로를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당신은 참 별 것 다하는 다기능 엔터테이너구나 라고 생각했었다.
하하하. 자동차회사의 협찬 프로에 출연한 것이었다. 원래 여행 좋아하고 자동차를 좋아해 자동차 칼럼니스트로도 활동했다. 사실 지금 즐겁게 하는 일은 돈 안 받고 하는 활동들이다. 국제기아대책기구, 생명의 전화, 사랑의 집짓기운동 등의 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기아대책기구 일로 파키스탄도 다녀왔고 지난 4월에는 인도도 보름간 다녀왔다.
어느 문화강좌에서 ‘당신도 화술의 마법사가 될 수 있다’는 주제의 강좌 제목을 본 적이 있다. 물론 강사는 배한성이었다. 성우가 목소리 연기는 잘하지만 화술까지 프로라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스스로를 어떻게 보는가?
나는 성우생활 초기부터 목소리에 기교나 잔재주를 부리지 않았다. 내가 새까만 후배시절 선배들의 목소리는 모두가 멋을 부리는 목소리에 심취해 있었다.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김창환 선배는 아주 멋있는 목소리의 왕자였다. 그렇지만 나는 왠지 내가 가진 그대로의 순수한 목소리로 승부를 보고 싶었다. 본래의 목소리가 언젠가는 가식의 목소리보다 더 인정을 받을 거라는 내 나름의 신념이 있었다. 내가 마법의 화술을 가르칠 능력은 없지만 진실한 나의 체험적 지식을 전해줄 수는 있다.
이제 당신 스스로가 밝힌, ‘불우한 성장기가 42년 인기의 기초 에너지였다’는 쪽으로 화제를 돌려보자. 무엇이 그렇게 불행하고 불우했다는 것인가?
(여기에서 배한성은 문득 침묵했다. 한참동안 시선이 커피숍 노천 카페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 꼭대기로 옮겨간다. 작고 예쁜 잎들이 초가을 바람에 잔물결처럼 일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두 눈에는 곧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기 시작했다.)
어머니와 동생까지 우리 가족이 정릉에 있는 문간방을 세 얻어 살 때 내가 소년 가장이었다. 밥 세끼를 제대로 먹은 적이 없었다. 간신히 초등학교를 졸업해 장학금을 주며 공짜로 공부시켜준다는 가까운 고명중학교를 지원했다. 입시가 있던 시절인데 내가 1등으로 입학해 학생대표로 입학식에서 답사를 읽게 됐다. 그 소식을 알리려고 집에 뛰어 들어가니 동생이 어머니에게 꾸지람을 들으며 얻어맞고 있었다. 아마도 그날 아침밥을 제대로 못 먹고 학교에 간 아들이 불쌍해 어디서 인절미 3개를 구해 두고 나를 기다렸는데 동생이 그걸 먹겠다고 해 화가 나신 것이다. 나의 요청으로 그 인절미를 셋이서 하나씩 나누어 먹고 나머지 빈 속을 물로 채웠다.
동화 속에 나오는 얘기처럼 느껴진다. 일찍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는가?
아버지는 서울대 공대를 나온 수재였지만 공산주의자였다. 전쟁 통에 월북을 하셨다. 어머니는 부잣집에서 자라 일제 강점기에 서울여상까지 다닌 신여성이지만 생활력이 전혀 없으셨다. 친구들 엄마처럼 방물장수 같은 것도 못하시고 조용히 가난을 받아들이는 분이셨고 위장 등 건강도 안 좋으셨다.
그럼 생활비를 어떻게 마련했는가?
내 소년기는 신문배달로 보냈다. 그때 신문배달도 배달지역을 나누어 한 곳마다 사수가 있고 조수격인 보조원이 있었다. 조수 자리도 엄청나게 들어가기 힘들었던 시절인데 셋방 주인집 형이 도와주었다. 배달하면서 가장 힘든 것은 시계가 없어서 매일 새벽 등산객의 떠드는 소리를 듣고 잠자리에서 일어나 보급소로 달렸다.
어느날은 깨어보니 밖이 환했다. 하얗게 눈이 내린 밤에 시간을 몰라 늦은 줄 알고 그냥 40분 거리의 보급소로 향했다. 그런데 아리랑 고개를 넘다가 잠복한 야경꾼들에게 붙잡혀 도둑놈으로 몰려 죽도록 얻어맞았다. 구두발로 짓밟은 후 후래쉬로 내 얼굴을 본 그들이 어린 소년임을 알고 미안하다며 풀어주었다.
지금과 세상이 달라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이라 시간을 잘 못 알고 집을 나와 봉변을 당한 것이다. 그날 아리랑 고개를 눈물로 넘어서 아역스타 안성기가 있는 보문동 집 앞을 지나다가 파출소 경찰에게 또 걸려들었다. 남루한 소년이 불쌍했던 경찰은 파출소 숙직방 아랫묵에서 나를 재워주었다.
연예계로 관심을 가진 것은 언제부터인가?
나는 영화를 좋아했다. 어쩌다 영화포스터를 붙이는 사람 집에서 공짜표를 얻어 영화구경을 하면서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 집에 신문을 공짜로 넣어주고 표를 얻어 학생 모자를 감추고 가까운 돈암동 동도극장을 출입했다. 그때부터 인기배우였던 허장강 김승호 같은 분들의 목소리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사실 고백하자면 1961년 16살 때 임권택 감독이 <두만강아 잘있거라>라는 영화를 준비할 때 우연히 시나리오를 읽고 작품 속의 소년병사가 하고 싶어서 장문의 글을 써서 지원했다. 일주일만에 사진을 보내라는 답장이 왔다. 남의 옷을 빌려 사진을 찍어 보냈으나 배역에 안맞으니 다음에 보자는 연락을 받고 절망했다. 엊그제 전주소리축제에서 임권택 감독을 만나 15년 전에 한번 하고 이번에 또 그 얘길 끄집어냈더니 자신이 실수했다며 껄껄 웃으셨다.
그 무렵만 해도 성우가 영화배우 못지않게 인기를 누렸다. TBC 공채로 성우가 된 것이 1968년으로 알려져 있다.
아니다. 1966년이다. 성우 공채 응모자가 1800여명으로 180대 1의 관문이었다. 나는 일찍 내 분수를 알았다. 트위스트 김보다는 잘 생겼지만 신성일 정도의 미남은 아니므로 그 중간쯤 얼굴로는 신성일 같은 배우가 될 수 없구나 생각했다. 차선의 꿈을 성우에 걸었다. 덕수상고 2학년 때 DBS(동아방송)에 응시했다가 떨어졌다. 참 다행인 것은 나이가 응시자격이 안되어 6촌형 이름으로 응시했으니 합격해도 큰일 날 뻔했다. 참 철없던 시절이었다.
덕수상고로 진학한 것은 취업을 생각해서였겠다. 졸업하고 대학을 갈 정도면 집안 사정이 좀 좋아진 건가?
그것도 사연이 길다. 취직 잘되는 덕수상고도 낮에는 과외교사 등 아르바이트 하고 야간을 다녔다. 그때도 4등으로 입학했다. 그런데 상고는 주판을 잘 만져야 되는데 나는 어릴 때 검지가 도끼에 찍혀 보다시피 손끝이 약간 기형이다. 주판 놓는데 불편해 제대로 성적을 낼 수 없어 졸업하고 힘든 시간이 찾아왔다. 그 때 구세주가 나타났다. 내 형편을 알고 있는 친구가 사채놀이를 하는 외삼촌에게 돈을 빌려 학자금을 마련해준 것이다.
서라벌예대(현재의 중앙대) 방송연예과 진학은 평소 원하던 전공을 찾은 것이었겠다.
고려대 신방과를 가고 싶었지만 오히려 그곳에서 멘토(Mentor)가 되어 준 연출가 출신 이원경 교수를 만났다. 대학시절 실기과제를 내면 나의 기량은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그 분은 다른 학생에 비해 뛰어난 나의 재능을 인정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서운했다. 알고보니 오히려 장래가 있음을 알고 차분하고 겸손하게 지식과 실력을 닦도록 야무진 가르침을 안겨준 거였다. 연예인으로서의 나의 기초지식은 모두 그 분이 세워준 것이다.
참, 궁금한 사람이 있다. 고은정 씨와 콤비로 성우시대의 큰 별이었던 구민 씨의 근황이 궁금하다.
10여년 전 미국으로 이주하셨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목소리를 판박이로 내신 전설적인 선배인데 근래 소식을 알 수 없다.
젊은 후배들에게 당신이 체험으로 얻은 지혜로운 삶의 철학을 들려달라. 42년간 쉬지 않고 일하며 명예를 유지할 수 있는 비결을.
오프라 윈프리가 한 말이 생각난다. 지금 최선을 다하면 언젠가 최고가 된다는 말이다. 꿈을 현실로 이루는 데는 최선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그리고 살면서 만나는 사람 중에는 남을 위대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이 있고 자기만 위대해지려는 사람이 있다. 내가 위대해지려면 남을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더 소중하다는 생각을 늘 하며 살고 있다.
어머니와 가족분의 안부도 궁금하다.
고생하신 어머니는 올해 86세로 건강하게 사신다. 가족은 아내와 1남 2녀로 모두 즐겁고 편안하게 지내고 있다.
인터뷰365 김두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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