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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오헤어 강윤선 대표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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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윤선 대표 (준오헤어)
국내 최대 직영 미용기업 (주)준오뷰티 대표이사
2011 현재 : 서경대학교 대학원 교수
경복대학 교수
2011년 보건복지부 장관상 수상
2005년 세계적 화장품기업 웰라가 뽑은 '세계 10대 헤어브랜드'에 선정
웰라 트렌드 비전 어워드 5년 연속 수상
1979년 서울 돈암동의 4평짜리 작은 미용실 "고추잠자리"로 시작한 "준오헤어"는
현재 전국 75개 직영점을 지닌 거대 미용기업이 되었다.
전체 직원 수만 2천 5백명에 이르고, 이 중 180명 이상이 억대 연봉을 받는다.
또한 '준오아카데미'를 통해 매년 200여명의
신인 헤어디자이너를 배출하고 있다.
30여년 전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며 꿈을 키우던 어린 여고생 강윤선은 그렇게 맨손으로 자신의 비전을 하나하나 이루어 왔고, 그 열정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강윤선 대표 저서
청소년이 닮고 싶은 롤모델로 선정 된 강윤선 대표
요즘 미용실, 비싸도 너무 비싸다? 살짝 커트하는 데 몇만 원은 예사, 파마라도 하는 날에는 족히 한 달치 외식비를 감수해야 하니 그런 말이 나올 만도 하다. 가계부 걱정에 흘러내리는 머리를 딸아이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당신, 이래저래 미용실 값이 너무 비싸다고 따지고 싶다면 준오헤어의 강윤선 대표를 만나보시라! 18년 전 남편 몰래 집을 팔아 직원들을 런던 비달사순아카데미에서 교육했다는 그의 열정을 듣는다면, 아직까지 손님들이 좋아하는 커피 맛을 연구 중이라는 그의 고민을 엿본다면, 앞으로는 미대 졸업생이 헤어디자이너로 나서야 한다는 그의 자부심을 느낀다면… 당신은 ‘비싸다’고만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그를 만난 날 내가 그랬듯.
각 분야의 리더를 살펴보면 반드시 입지전적인 인물이 있게 마련이다. 미용에 뛰어든 지 32년. 13제곱미터 남짓 작은 동네 미용실로 시작해, 현재 직영 매장 62곳과 직원 2천여 명을 이끄는 준오헤어의 강윤선(52) 대표 역시 그 중 한 명이라 할 수 있겠다. 그와 인터뷰를 위해 준오헤어의 본사 격인 청담동 애비뉴준오에 가던 날, 미용업계의 입지전적인 인물답게 으리으리한 건물부터 그의 성공을 가늠하게 한다.
하지만 인터뷰 차 마주앉은 강윤선 대표는 자신은 절대 ‘입지전적’이라 할 만큼 산전수전 다 겪은 CEO는 아니라고 밝힌다. 그의 ‘해명’은 그가 밝히는 실화에서도 잘 드러난다. “한번은 MBC-TV <성공의 비밀>에 출연해보면 어떻겠냐는 제의를 받았죠. 그런데 제 얘기를 쭉 듣더니 어렵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제겐 뭐랄까, 칠전팔기 같은 드라마틱한 역경이 없다나? 생각해보니 지금껏 그런 역경이 없더라고요.”
그는 그 이유로 좋아하는 일, 하고 싶은 일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했기 때문이라 말한다. 가슴으로 이뤘다는 그의 도전을 들어본다.
서비스 좋은 미용실을 하고 싶었던 10대
강윤선 대표, 그가 미용업계에 뜻을 품은 건 열여덟 살 때다. 당시 상고에 다니던 그는 멋내기를 좋아해 ‘혜은이 바람 머리’ 스타일링을 위해 매일같이 200원을 들고 단골 미용실에 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미용실 의자에 앉은 채 인생의 전기를 맞는다. “앞머리를 고데기로 말고 있는데 보따리를 든 아줌마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리고는 미용실 언니에게 보따리를 잠시만 맡겨둘 수 없냐고 사정했죠.” 단칼에 거절하는 미용실 직원을 보며 강 대표는 ‘저 보따리만 받아줘도 손님이 더 올 텐데…’라는 엉뚱한 생각을 했단다. 그렇게 ‘손님’이 떠나는 게 너무 슬펐다던 그는 일주일 만에 진로를 바꿨다. 상고를 그만두고 미용학교에 등록한 것이다.
“생각해보니 제가 하면 잘할 것 같더라고요. 저라면 그런 보따리를 잘 맡아줄 것 같았죠. 손님을 손님으로만 보지 않고 마음으로 잘 해줄 수 있겠다고요.” 여자가 기술을 배우면 팔자가 세다는 주변의 우려도 있었지만, 하고 싶은 건 꼭 하고야 마는 성격에 그는 결국 미용고등학교를 졸업한다.
졸업 후 그를 기다린 건 고단한 스태프 생활. 헤어부터 메이크업, 마사지 등 배워야 할 기술은 많고 시간은 부족해 기술 좋기로 소문난 변두리 미용실을 찾아 기숙사 생활을 자처해가며 일을 배웠다. 하루 14시간 노동 끝에 받은 첫 달 월급은 1만2천 원. 5년 뒤, 디자이너로 첫 이름을 날리던 그는 연신내에 작은 미용실 ‘고추잠자리’를 오픈한다.
일수 아줌마에게 5부로 빌린 150만 원이 창업 자금
그의 나이 스물넷. ‘나만의 살롱을 열겠다’는 확실한 목표 때문이었을까. 가진 거라고는 열정과 기술 밖에 없었지만, 그의 창업은 남들보다 빨랐다. 물론 가진 돈은 없었다.
“친구와 투자하기로 했는데 수중에 몇십만 원도 없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동네에서 누가 제일 돈이 많은가 생각했죠. 따져보니 일수 아줌마더라고요!” 결국 일수 아줌마를 쫓아간 그는 5부 이자로 거금 150만 원을 빌리는 데 성공한다.
큰 인기를 끈 조용필의 ‘고추잠자리’(그는 고추잠자리의 모양이 가위 같다고 했다)에서 이름을 따왔다는 숍은 오픈 6개월 만에 손익분기점을 넘어섰다. 두 달 이후 손님이 줄을 서더니, 아이로니컬하게도 그는 얼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손님이 없어 걱정한 적이 없단다. 곧 그는 돈암동에 ‘준오미용실’을 오픈한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준오헤어의 전신이다.
준오미용실의 태동은 개인적으로도 남다른 의미를 안겨줬는데, 오픈과 동시에 당시 마샬 헤어팀장이던 지금의 남편과 결혼한 것이다. 이듬해 첫딸을 낳고, 이어 둘째와 셋째를 낳은 것처럼 그는 오픈 10여 년 만에 돈암동에 매장을 5개로 넓히더니, 1992년에는 드디어 이대로 진출한다. 흥미로운 사실은 “매장을 늘릴 수밖에 없었다”는 그의 남모를 사연이다.
“처음 준오미용실을 오픈했을 때만 해도 우리 부부랑 디자이너 3명이 전부였죠. 그런데 몇 년 새 직원이 50명에 이른 거예요. 직원들이 한번 들어오면 나가지 않았죠.” 결국 그는 직원이 200명을 넘어서자 ‘이대 진출’을 꾀한다. 당시 직원 200명을 데리고 지하철 2호선 이대입구역에서 정문까지 일렬로 서서 손님들을 향해 90도로 인사하며 치른 ‘신고식’은 오래도록 이 바닥의 전설이 되었다. 2년이면 새 둥지를 찾아 떠난다는 미용업계의 이직률을 생각해보면 참으로 놀라운 풍경이다. 더욱 놀라운 건 입사 20년이 지난 직원이 지금껏 여럿 있다는 사실이다.
62개 직영 매장, 2천 명을 이끄는 힘
현재 준오헤어의 직원 2천 명 중 입사 10년이 지난 직원은 4백여 명에 이른다. 평생직장이 사라지는 요즘, 분명 보기 드문 장면이다. 여기에는 강 대표의 리더십이 주효했다. 지금부터 17년 전, 그는 남편 몰래 집을 처분해 직원 50명중 20여 명을 뽑아 런던 비달사순아카데미로 단기 유학을 떠났다. 20일 동안 소요된 비용만 1억5천만 원. 그날 이후 남편은 “그때 그 일이 하도 서프라이즈해서 난 다른 여자랑은 시시해서 못 살겠다”고 말할 정도.
“당시 직원들은 물론 나 역시 미용실 언니 뒤에서 주먹구구식으로 기술을 배웠다는 사실이 너무 갑갑했죠. 늘 더 좋은 기술을 배우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그때가 준오헤어 교육의 시작이었죠.” 이를 계기로 강 대표는 직원들의 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가능성 있는 직원을 일본과 미국 등의 선진화된 교육장으로 보내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 속엔 해외 연수를 통해 생긴 자신감도 한몫했다.
“막상 선진국의 교육 현장에 가보니, 다른 나라는 교육이 체계적인 데 반해 손재주가 부족하더라고요. 손재주는 우리나라 미용사를 따라오지 못했죠. 우리 미용이 좀더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것만 갖춘다면 충분히 경쟁력이 있다고 생각했죠.”
그는 해외에서 익힌 교육을 바탕 삼아 1994년 직원들의 트레이닝 센터라 할 수 있는 ‘준오아카데미’(3년간 스킬·리더십·고객 세일즈·마인드 교육 127학점 이수해야 정식 스태프로 등극)를 설립했다. 이를 디딤돌 삼아 준오헤어는 곧 명동으로, 압구정으로, 분당으로 급속도로 확장되어나간다.
계산 못 하는 사람이 사업에 성공했다?
애당초 그가 ‘사업’을 할 작정이었다면 62개 직영 매장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차이즈만 해도 충분히 돈이 되고 남는 시대가 아니던가. 그는 이를 두고 “계산을 못하니 오히려 사업이 되더라. 계산이 되는 순간 사업은 할 수 없는 것 같다”고 설명한다. 이는 돈암동 5개, 강남 5개, 분당 6개에 이르는 매장 분포만 봐도 잘 알 수 있다. 분명 ‘체계’와는 거리가 멀다.
“(웃음) 계산이 안 되니 지금껏 무슨 일을 저지르는지 모르게 투자를 해온 것 같아요. 내게 목적은 1억, 10억, 20억, 50억… 이런 게 아니라 아주 막연한, 반듯하고 제대로 최고가 되어야겠다는 그 무엇이었으니까요.”
그의 비계산적인 투자는 내부의 힘으로 다져졌다. 여기엔 미용이 누구나 팔고, 그 맛도 똑같은 ‘라면’이 아니라는 관점이 적용된다. 미용이야말로 누가, 어떻게, 어떤 마음으로 하느냐에 따라 그 결과가 천차만별이기 때문이다. 그 결과를 매출로 귀결시킬 수는 없지 않는가. 결국 그는 ‘돈’ 대신 헤어디자이너의 ‘마음’과 ‘손’에 주목하기로 한다.
이는 곧 직원 채용의 기준이 되기도 하는데, 그는 새 헤어디자이너를 뽑을 때 마음이 넉넉한지, 미용을 즐기는지, 사람을 대하는 걸 좋아하는지 눈여겨본단다. 그는 “헤어 기술보다 먼저 필요한 게 거울 속의 고객과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을 사랑하고 좋아하는 마음, 내 고객을 더 아름답게 해주고 싶다는 마음”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것이야말로 기술이 늘면서 고객을 부를 수 있는 가장 큰 힘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요즘 강 대표는 외부 활동이 부쩍 잦아졌다. 오래전부터 해온 한성대학교 예술대학원 교수 활동에 이어 최근 끊임없이 들어오는 강연 제안 때문이다. 지난달만 해도 산업은행, 대우증권, 한국화학, 코리아나, 미래산업, KTF, 한국금융연구원, 카이스트 등 어림잡아 8개 업체의 직원 교육 강사로 나섰다. 모두 ‘돈’이 아닌 ‘마음’으로 꿈을 이룬 그의 성공담을 듣기 위해서다. 하지만 정작 그가 하고 싶은 말은 ‘다양한 꿈’에 관한 이야기다.
“온 국민이 자식을 대기업에 보내는 걸 꿈꾸잖아요. 하지만 대기업 가서 임원까지 하면 아이가 행복해질까요? 남들이 인정하고 남들에게 잘 보이는 직업 말고, 이 일 아니면 죽어도 좋다는 마음으로 일하는 게 정말 행복 아닐까요? 모두 같은 꿈을 꿀 필요는 없잖아요!”
사실 이런 얘기는 준오헤어 직원이라면 귀에 못이 박힐 만큼 들어왔을 터. 그는 ‘혼자 가면 빨리 갈 수 있지만 함께 가면 멀리 갈 수 있다’는 마음에 매일 아침 직원들과 티타임을 갖는다. 인터뷰가 있던 날도 스크랩해둔 신문 기사를 보며 직원들에게 큰 꿈과 포부를 가질 것을 요청했다. 그의 손에 들려 있던 기사는 토리노 2010 ISU 세계피겨스케이팅 선수권대회에서 2위를 한 김연아 선수에 대한 기사였다.
“미래는 예측하는 게 아니잖아요. 자신이 어떻게 만들고 싶은지가 중요하죠. 저 역시 쉰둘이 된 지금까지 미용을 할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죠. 하지만 이렇게 일하잖아요.”
그는 지금도 무얼 하고 싶은지 끊임없이 생각한단다. 곧 그의 꿈은 베벌리힐스를 거점으로 한 해외 매장으로 이어질 듯싶다. 10년 내 국내에 직영점을 150개로 늘리겠다는 게 그의 포부.
미용업계에 뛰어든 지 32년, 그는 한 번도 꿈꾸기를 멈춘 적이 없다. 그에게 지금 서 있는 이곳, 미용실이라는 공간은 그야말로 ‘꿈의 공장’이 아닐는지. 집 앞 작은 미용실이 변신을 꿈꾸는 우리의 꿈의 공장이 되듯.
강윤선대표 -INTERVIEW (2010년 04월 468호) ⓒ www.mizn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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