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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생활과학 한경희 대표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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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생활과학 한경희 대표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파인드강사 2013. 2. 13. 13:28

 

 

강사섭외/기업특강/명사섭외/유명인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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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희 생활과학 대표

한경희


2012 포브스 아시아 아시아 파워 여성기업인 50인

2010 청년고용 홍보대사

2008~ 한경희뷰티 대표

2008 월스트리트저널 주목할 만한 여성기업인 50인

2005 발명의 날 대통령 표창

2004 벤처대상 신지식인

1999~ 한경희 생활과학 대표

1990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 대학원 경영학 석사

1998 교육인적자원부 교육행정사무관

1986 국제올림픽위원회

이화여자대학교 불어불문 학사



 

 

 

 

 

 

 

 

[뷰앤비전]임진년, 어릴 적 꿈에 도전해보자

 

 

2012년 새로운 해가 밝았다. 한 해의 시작에는 모두 새로운 각오를 다지기 마련이지만 올해는 60년 만에 온 흑룡의 임진년(壬辰年)이라 더욱 큰 다짐을 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 같다.
 

'어릴 때 꿈은 다 대통령이었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만큼, 나이가 한 살 더 들수록 꿈의 크기가 작아진다고들 한다. 이미 늦었다는 이유로 도전조차 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올해는 용의 기운을 믿고, 10년 전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며 그 어느 때보다 더 큰 목표를 설정했으면 한다.
 
혹자는 책 속에나 나올 법한 말이라고 할지 모르나, 늦은 나이에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지만 도전과 열정으로 끊임없이 달려온 나이기에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필자는 서른 세살에 결혼을 하고, 서른 여섯에 사업을 시작해 마흔이 훌쩍 넘은 나이에 생활가전에서 주방과 뷰티 시장에 도전했다. 모든 내 주변 사람들이 내가 한 살 더 먹을 때마다 걱정하고, 충고하기도 했지만 나는 한 번도 한 해가 넘어간다고 해서 내 목표와 책임감의 크기를 줄여본 적이 없다.
 
내 목표는 주부를 비롯한 여성층 고객에게 좀 더 편리한 삶을 선사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1999년 창업 이후 스팀청소기를 선보여 시장을 개척했고 스팀다리미와 워터살균기, 침구킬러 등 다양한 소형생활가전 제품들을 출시했다. 또 지난해 4월에는 마그네슘 프라이팬 시장에 진출했고 올해에는 정수기 시장에도 뛰어들 예정이다.
 
이와 함께 화장품 사업에도 진출, 히팅뷰러 마스카라와 진동파운데이션 등 차별화된 다양한 제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화장품 사업을 담당한 자회사의 사명도 에이치케어에서 한경희뷰티로 변경했다. 여성을 위한 기업으로 성장한 한경희 그룹의 이미지와 화장품이라는 사업 카테고리를 결합해 소비자 신뢰도를 강화하고 '글로벌 스마트 뷰티 브랜드'로 성장하겠다는 의지다. 이 모든 것이 여성층 고객에게 행복한 삶을 선사하기 위한 노력들이다.

 

 

 

사업가는 경영 원칙과 책임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지속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힘이다. 나 또한 사업 초창기부터 원칙과 책임감을 가지고 경영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 '진심', '편리함' 등은 내가 지켜나가고 있는 세 가지 원칙이다. 또 진심으로 고객을 대하고 누구나 부담없이 쓸 수 있는 합리적인 가격과 품질의 제품을 개발해야 한다는 책임감을 갖고 이를 실천하고 있다. 그렇게 어느 새 기업인으로서 12년이라는 시간을 보냈고 감사하게도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누구나 알 만한 브랜드의 기업, 월스트리트(Wall Street)나 포브스(Forbes) 같은 세계적인 언론에서도 취재 요청이 들어올 만한 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지금도 새로운 시장에 도전한다.
 

최근, 새로운 도전을 준비하는 여성들에게 응원의 메시지를 전하는 매거진의 한 인터뷰에 초청이 됐다. '가열찬 용기로 인생 2막을 연 선배의 실속있는 정보와 따듯한 조언'이 그 코너의 취지라고 적혀 있었다. 새로운 도전에 얼마나 많은 용기가 필요한지, 수많은 실패를 맛봐야 하는지 알기에 항상 조심스럽지만, 그럼에도 필자의 얘기를 세상에 꺼내놓는 이유였다.
 
실현 가능성이 높은 다짐을 하는 것도 좋지만, 올해엔 아주 오래 전부터 꿈꿨지만 도전하지 못했던 꿈을 설정해보자. 나의 원동력을 전하며 모든 사람을 응원한다. 자신의 아이디어에 확신을 갖고, 절대 희망을 잃지 말아라. 마지막으로 조금만 더 버텨라. 남들이 모두 백기를 들고 포기할 때 한 걸음 나아가 생각지도 못한 기적을 경험한 적이 수 없이 많다. 그 어느 누구에게도 너무 늦은 시작이란 없다.
 
오랫동안 물속에 잠겨 있다 풍운을 거느리며 상서로움을 전한다는 용의 기운이 2012년 대한민국에 가득한 한 해이길 빌어본다.

 

◀◀ 한경희의 칼럼 보러 가기 ▶

 

 

 

[김진세의 인터뷰_긍정의 힘]‘아줌마 파워’ 주부 CEO 한경희




‘주부가 만든 스팀청소기’로 화제를 모은 한경희 대표(47)를 인터뷰한 적이 있다. 7년 후 이젠 세계를 상대로 한국 아줌마의 저력을 뽐내고 있는 그녀를 다시 만나 손을 맞잡으니 왠지 모를 뿌듯함이 밀려왔다. 대한민국 대표 주부 CEO ‘한경희생활과학’의 한경희 대표의 성공 스토리는 곧 우리 주부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편집자 주)

김진세_ 한경희 대표님께서 그동안 여러 가지 일을 하셨잖아요. 제가 인상적으로 본 기사는 2008년 「월스트리트」 저널이 선정한 ‘주목해야 할 여성 기업인 50인’에 뽑히신 것, 그리고 저희 집에 있는 스탠드형 스팀다리미! 이런 것들이 저한테는 강렬한 이미지로 남아 있어요.

한경희_
네.
김진세_ 이렇게 내내 바쁘게 사시면 개인적인 삶은 어떠실까, 그게 궁금했어요.

한경희_ 우리나라는 아무래도 인간관계를 하고 영업을 하는 데 있어 술자리가 많이 필요한데, 저희 집안 사람들이 워낙 술을 못 마셔요. 저는 다행히 영업을 잘하는 분들을 모실 수가 있었어요. 더군다나 중학교 1학년,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 있어요. 제가 바쁘니까 저녁은 아이들과 같이하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머리맡에서 책을 읽어주면서 재워주는 게 원칙이에요. 그래서 가급적이면 저녁 약속은 잡지 않고 외부 활동도 거의 안 하고 살았어요. 그러니까 주변에서 신비감에 싸여 있다고…(웃음).

김진세_ (웃음) 워낙 개인적인 외부 활동은 안 하시나봐요.
한경희_ 알려진 거 같긴 한데, 생전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얘기를 많이 듣죠(웃음). 도와주시는 분들이 많아서 그런 생활이 가능한 게 감사한 일이죠.
김진세_ 엄마 역할은 그렇게 하고 계시고, 아내의 역할도 하셔야 하잖아요. 그건 또 어떻게 하세요?
한경희_ 아유, 애들 일찍 재우잖아요(웃음).

 

 

생활이 곧 일, 살림에서 손을 놓을 수 없어
김진세_
한 대표님께서 처음 스팀청소기를 개발하게 된 동기가 걸레질이 너무 하기 싫어서였다고 들었거든요.
한경희_ 그랬죠.
김진세_ 아무래도 독자 분들은 실제로 한 대표님께서 어떻게 살림을 하는지가 궁금할 거 같아요. 어떠세요? 솔직하게….

한경희_ 저희는 생활이 곧 일이거든요. 무릎 꿇고 청소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스팀청소기를 개발했고, 쭈그려 앉아 다림질하는 게 고역이라서 스탠드형 스팀다리미를 개발했어요. 그리고 행주나 도마 같은 거 소독하는게 번거로워서 친환경 살균기도 만들었고요. 생활에서 제품이 나오기 때문에 집안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다만 제가 워낙 출장이 잦다 보니 제 손으로 집안일을 다 하지는 못하죠.
김진세_ 가끔 요리도 하세요?
한경희_ 그럼요. 일주일에 한 번 아이들에게 핫케이크를 해주거든요. 워낙 단 음식을 안 먹이다 보니까 아이들은 핫케이크가 최고로 맛있는 줄 알아요(웃음).

김진세_ 작전이시군요(웃음).
한경희_ 애들은 최고로 맛있는 게 라면, 자장면, 핫케이크예요. 아직은 어리니까요.
김진세_ 아들만 둘 두신 거죠? 아들만 둘이면, 농담처럼 하는 말이 엄마가 예쁘게 시집 와서 깡패처럼 된다고들 하죠(웃음).
한경희_ 맞아요(웃음).
김진세_ 아이들 교육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갖고 계세요?

한경희_ 시어머니가 아들 셋, 딸 둘을 두셨는데 굉장히 엄하게 키우셨어요. 또 다른 사람들에게 자식 자랑도 하지 않지만 허물도 얘기하지 않으세요. 항상 좋은 면, 잘하는 면만 보려고 하시죠. 그 5남매가 하나같이 잘 컸어요. 어느 집에나 자식이 둘이든 셋이든, 적어도 꼭 한 놈은 속을 썩이잖아요(웃음).
김진세_ 그렇죠.
한경희_ 그런데, 정말 그런 자식 없이 모두 잘 키우셨어요. 참 존경할 만한 분이죠. 그래서 저도 애들을 키우면서 잘하는 점을 살리고 격려해주려고 노력해요. 아까 말씀하셨듯이 아들 둘이 있으면 정말 깡패가 되기가 쉬운 환경이에요. 하지만 가능한 한 스스로 알아서 할 수 있게끔 해요. 아직까지는 아이들에게 이야기할 때는 어린아이 대하듯 하게 되지만요.

김진세_ 아무래도 그렇죠.
한경희_ 아직은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 뽀뽀도 많이 하는데, 남편은 이제 아이가 중학교 들어갔으니까 털 난 놈한테 그러면 안 된다고(웃음).
김진세_ (웃음)
한경희_ 요즘은 애들이 제가 뽀뽀하려고 하면 천원을 내라고 해요. 뽀뽀를 안 해주려고 하는 거죠. 이제는 좀 그런가 봐요.
김진세_ 어색한가 보죠.

한경희_ 네. 그래도 애들하고는 굉장히 사이가 좋은 편이에요.
김진세_ 아빠는 아이들과 많이 놀아주세요?
한경희_ 제가 엄한 편이라서 아빠가 대신 아이들을 많이 풀어주는 편이에요. 우리나라 아빠들이 그렇잖아요. 강남 엄마들이 그런다면서요? 애가 성공하기 위해서 필요한 세 가지가 엄마의 정보력, 아빠의 무관심, 할아버지의….
김진세_ 재력이요?

한경희_ 네. 정말 그런 것처럼 아빠들은 대체로 ‘좋은 학교 나와봐야 소용없다, 인성이 중요하다’라고들 하잖아요? 제 남편도 공부 잘하는 사람보다는 훌륭한 사람으로 키워야 된다는 생각이 더 커요. 남편은 대체로 애들이 원하는 거 해주고 공부는 제가 시키죠.
김진세_ 사실 아빠 입장에서는 아들들과 노는 게 재밌거든요. 같은 남자니까 보고 배우는 것도 있을 거고요. 그런데 엄마 입장에서는 딸이 없으셔서….
한경희_ 아이들이 워낙 착해서 아직까지는 정말 착하게 클 것 같고, 효도를 할 것만 같은데(웃음), 그래도 딸이 있으면 훨씬 아기자기할 거 같아요.

 

 

은근한 고집, 문학소녀 막내딸
김진세_
대표님께서는 어려서 어떤 딸이셨어요?
한경희_ 저는 고집이 셌어요. 오빠가 두 분이 있고, 제가 터울이 좀 있는 막내거든요. 그렇다 보니 오빠끼리는 되게 친해요. 저는 여자고, 나이 차이도 나서 혼자 자라다시피 했죠.
김진세_ 몇 살 차이가 나세요?

한경희_ 큰오빠와 다섯 살, 작은오빠와 네 살 차이가 나요. 할머니만 해도 워낙 손자들 위주시잖아요? 제가 좀 세서 그걸 받아들일 수가 없었던 거예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오빠들과 똑같이 나눠 먹으려 들고(웃음), 똑같은 대우를 받으려고 했죠. 그런 투쟁의식이 있었어요. 그래서 오빠들은 안 맞았는데 저는 고집이 세서 맞고 자랐대요. 엄마 말씀에 의하면 그래요.
김진세_ 타고난 기질이 강하신 거죠?
한경희_ 저 때만 하더라도 여자애들 대부분의 꿈이 신사임당, 현모양처였어요.

김진세_
네. 그럴 만했죠.
한경희_ 그런데 저는 그런 꿈이 없었어요. 독립하고 싶은 생각이 굉장히 강했고, 책을 무척 많이 읽었어요. 고등학교 3학년 입시 앞두고 책을 놓을 때까지 소설, 시 등을 엄청나게 읽으면서 스스로 최고로 잘난 맛에 살았던 거 같아요.
김진세_ 막내딸이면 그러실 수도 있는 게, 워낙 아버지들이 딸에 대해 애틋하잖아요. 제 여동생도 집에서는 완전히 공주였거든요.
한경희_ (웃음).

김진세_ 지금도 그래요. 얼마 전에 가족 모임 자리에서 제가 아버지께 엉겨 붙었더니 제일 싫어하는 게 여동생이에요. 그만큼 부녀지간은 특별하죠. 한 대표님은 아버님과 어떠셨어요?
한경희_ 제 아버지는 조금 괴팍스러우셨어요. 누구도 근접할 수 없는, 누구도 쉽게 말할 수 없는 그런 분이셨거든요. 저도 사실은 아버지와 그렇게 친하지는 않았는데도 모든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볼일이 있으면 저한테 먼저 얘기를 했어요(웃음). 집안에서는 그래도 제가 아버지와 제일 친했으니까요. 어머니, 아버지께서 혹 부부싸움을 하시면 제가 항상 중재역할을 했는데, 결론은 꼭 아버지 말이 옳다고 했어요(웃음).

김진세_ 아버지 편을 드셨군요?
한경희_ 네. 아버지 편을 들었죠. 아버지도 저한테는 좀 특별하셨던 거 같긴 한데, 워낙 살가운 분은 아니셨어요. 아버지께서는 선생님이셨는데 하루 세끼를 거의 함께 식사를 했어요.
김진세_ 관사에 사셨어요?
한경희_ 아니요. 발령이 나면 반드시 학교에서 엎어지면 코 닿는 데다가 집을 얻으셨어요. 그래서 항상 식사를 같이할 수 있었죠. 그럴 때마다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많은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김진세_ 아, ‘밥상머리 교육’을 하셨군요.
한경희_ 네. 본인의 경험이나 들은 이야기, 아니면 세상 돌아가는 사정 같은 걸 항상 말씀하셨어요. 어려서는 아버지 말씀이 최고로 옳다고만 생각하다가 머리가 크면서부터는 다른 시각을 가진 사람도 있다는 걸 알게 됐죠. 그러면서 굉장히 반항을 하기도 했어요.
김진세_ 언제였나요?
한경희_ 고등학교 졸업하고 대학교 입학하던 시기였어요. 아버지의 영역으로부터 떠나고자 하는 독립 의지가 굉장히 컸거든요. 어쨌든 식사 때마다 아버지 얘기 들으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건 사실이죠. 그게 가장 큰 교육이었던 거 같아요. 저한테는 정말 중요한 분이죠. 제 삶에 있어서 가장 의미 있는 분이시고.

김진세_ 지금은?
한경희_ 돌아가셨어요. 5년 됐네요.
김진세_ 아, 그럼 어머님은 어떤 분이세요?
한경희_ 굉장히 부지런하세요. 제가 니체의 책을 읽으면서 치열하게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많이 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 보면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거 같아요. 교사 박봉으로 자식 셋을 키우느라 절약이 몸이 밴 분이세요. 그야말로 우리나라 알뜰살뜰 주부의 대명사(웃음).
김진세_ 아까 대학 들어갈 무렵에 아버지에 대한 반발심이 컸다고 하셨잖아요. 사춘기가 늦게 온 건가요?

한경희_ 사춘기라기보다는 그냥 머리가 커가는 과정이랄까요. 특별히 사춘기는 없었던 거 같아요. 그런데 사춘기가 대학 때도 오나요?
김진세_ 올 수 있죠.
한경희_ 아, 그래요? 저는 중·고등학교 때 친구를 많이 사귀기보다는 깊게 사귀고, 워낙 책을 많이 읽었어요. ‘문학소녀’들끼리 어울리곤 했죠. 그때는 시험 앞두고 벼락치기해서 성적을 어지간하게만 유지하면 부모님께서 저한테 신경을 안 쓰셨기 때문에 굉장히 자유롭게 살았던 거 같아요.
김진세_ 2005년에 쓰신 책 내용 중에 아버지께서 과외도 못하게 하셨다는 내용이 있었죠?

한경희_ “과외 안 돼, 독서실 안 돼, 학원 안 돼.”
김진세_ 아닌데, “늦게 자면 안 돼” 아니었어요?
한경희_ (웃음) 아, 맞아요.
김진세_ 그 내용을 읽는 순간, 요즘 애들 말로 ‘포스’라고 하죠? 아버지께서 정말 포스가 강한 분이라는 느낌이 확 들었어요.
한경희_ 저희는 다른 집들도 당연히 그런 줄 알고 살았거든요. 옛날에는 아버지들이 다들 그렇게 보수적이고 엄하셨잖아요?
김진세_ 그럼요. 우리가 예전에 맞았듯이 요즘 애들 그렇게 다루면 다들 집 나간다고 할 거예요(웃음).

한경희_ 한번은 제가 집에 불을 낼 뻔한 적이 있었어요. 평소에는 책을 읽느라 시험기간이면 벼락치기를 해야 했는데, 아버지께서 밤 10시 전에는 무조건 자라고 하셨거든요. 신문지로 유리창을 가리고 촛불 켜놓고 공부하다가 깜빡 잠들었거든요(웃음).
김진세_ 아버님께서는 왜 일찍 자라고 그러셨던 거예요?
한경희_ 아버지께서 평소 잠을 깊이 못 주무셨기 때문에 자식들은 절대 그렇게 되지 말라고 그러셨던 거 같아요. 커서 생각해보니 그래요.
김진세_ 사실은 일찍 자는 습관을 들이는 게 좋은 거거든요.
한경희_ 네. 어른이 되어서 보니 그런 뜻이더라고요.



 

원칙과 자유, 치열한 삶의 길잡이
김진세_
대학에서는 불문학을 전공하고 졸업 후 바로 스위스로 가셨는데 그것도 나름 목적을 가지고 추진한 일이셨어요?
한경희_ 당시만 해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전이라 외국에 가고 싶은 열망이 정말 컸어요. 그렇다고 집에서 유학을 보내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니까 무조건 외국으로 취직해야겠다고 목표를 세우고 국제기구(스위스 로잔의 국제올림픽위원회 본부)에 취직한 거죠.
김진세_ 어렸을 때부터 삶의 목적이 확실하셨네요. 그렇게 목표를 향하는 힘은 어디서 나오나요?

한경희_ 주관이 강해서 그런 거 같아요. 고집이 세서(웃음).
김진세_ 나쁜 거 아니에요. 대표님의 기존 인터뷰를 보니 원칙을 강조하는 말씀이 있는가 하면, 삶의 화두가 자유라고 하신 적이 있더군요. ‘원칙’과 ‘자유’에 대한 생각을 듣고 싶어요. 어쩌면 굉장히 상충될 수 있는 문제이기도 하잖아요.

한경희_ 우리 사회에서 사업가라고 하면 어딘가 떳떳하지 않은 그림자 같은 이미지가 있잖아요?
김진세_ 어떤 의미에서요?
한경희_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을 번다는 게 뭔가 술수나 부당한 수단이 있을 것만 같은 그런 산뜻하지 않은 느낌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제가 세운 원칙은 기업 활동으로 가치를 창출해서 고객에게 제공하고, 또 사회에 기여하겠다는 거였어요. 원칙에 입각한 경영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죠. 제 아버지께서 워낙 원칙주의자셨어요.
김진세_ 꼼꼼하시고요?
한경희_ 꼼꼼하기보다는 깐깐하셨죠(웃음). 특히 옳고 그른 것에 대해서요. 당신의 시각에서 옳은 것이 원칙이라는 점을 강조하셔서 저도 은연중에 그걸 삶의 기준으로 삼은 거 같아요. 사업을 하면서 원칙을 더 강조하게 됐고요.
김진세_ 반대쪽에 있을 수도 있고 혹은 같이 간다고 볼 수도 있는 ‘자유’는요?
한경희_ 치열하게 사는 것을 저는 자유라고 표현했어요. 매 순간순간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자신의 삶이 결정되는데, 스스로 만족하고 잘 살았다고 느낄 수 있는 마음의 자유가 궁극적인 자유인 거 같아요. 물론 그렇게 할 수 있으려면 정말 열심히 살아야겠죠.

김진세_ 원칙을 통해서 자유를 얻는다! 그렇게 연결이 되겠군요. 아, 궁금한 게 하나 더 있었어요. 대표님께서 “나에겐 아웃사이더 기질이 있다. 내 인생은 주류 인생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신 적도 있더군요.
한경희_ 아, 그래요?(웃음) 어렸을 때부터 독불장군 같은 이미지가 있었어요. 아마 일반적인 사회에서 요구하는 그런 여성상과는 달랐기 때문에 아웃사이더라고 느끼지 않았을까요?
김진세_ 당시 아웃사이더에 대한 설명을 하시면서 콤플렉스 극복 과정에 대한 이야기를 하셨어요. 어떤 콤플렉스를 가지고 계세요?
한경희_ 콤플렉스야 많죠. 이를테면 저희 집안에서 전 머리가 나쁜 편이었어요(웃음).
김진세_ 네?

한경희_ 모델 김동수씨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어요. 우리나라에서는 못생겼다고 해서 외모 콤플렉스가 있었는데 미국에 갔더니 다들 정말 예쁘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덕분에 모델로 성공할 수 있었는데 하여튼 우리나라는 정말 콤플렉스가 많은 환경이잖아요? 여러 분야에 걸쳐서 단일화된 표준을 강조하는 게 너무 많아요.
김진세_ 맞아요.
한경희_ 저희 때만 해도 그런 표준에서 벗어나는 것이 무척 어려웠잖아요. 그 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콤플렉스가 되는 세상이었기 때문에 저도 콤플렉스가 많았던 거 같아요. 얼굴도 못생겼지….
김진세_ 아유, 무슨 말씀이세요.
한경희_ 지금은 제가 변장을 했으니까요(웃음).
김진세_ (웃음).

한경희_ 콤플렉스를 극복하려면 자존감과 함께 자신의 삶에 긍지를 가져야 하는데, 그러려면 기존 사회의 기준을 부정해야 하잖아요?
김진세_ 그렇죠.
한경희_ 아이큐가 낮다면, ‘내가 단지 그 테스트에 나오는 문제를 못 풀어서 그런 거지, 다른 면에서는 내 머리가 좋아’라고 생각하는 식으로요. 콤플렉스가 굉장히 많은데 그걸 극복하기 위해서 항상 그런 식으로 나름의 개발을 하는 거예요(웃음).
김진세_ 틀린 말씀이 아니에요. 결국 콤플렉스라고 언급하신 것은, 여러 가지 꽉 짜인 사회에서 다른 모습을 갖기 위해 느꼈던 감정의 다른 표현인 거네요. 저는 우리 사회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톨레랑스(관용)라고 생각해요. 나와 다른 사람에 대해 너무들 부정적이잖아요? 거꾸로 이야기하면 조개구이가 히트쳤다고 하면 전국적으로 열광하다가 어느 순간 조개구이집이 싹 사라지는 것처럼요.
한경희_ 그러게요.

김진세_ 대표님의 말씀 참 좋았어요. 우리가 행복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고 이렇게 대화를 나눴는데, 그럼 이쯤에서 대표님께서 생각하시는 행복은 무엇인지 여쭤볼게요.
한경희_ 지금 저에게는 가족과 함께하는 게 가장 큰 기쁨이자 행복인 거 같아요.

 

 

한경희의 레이디경향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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