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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문성근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파인드강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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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동하는 양심-문성근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파인드강사]

파인드강사 2013. 2. 15. 13:28

 

강사섭외/기업특강/명사섭외/유명인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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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정치/시민의식/도전/열정/청년/청춘/소통]

 

 

 

 

문성근 영화배우, 정당인

 

출생 1953년 5월 28일 (일본)
소속 국민의 명령 (상임고문),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가족 아버지 문익환, 형 문호근
학력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학사
데뷔 1985년 연극 '한씨연대기'
관련정보 : 네이버[캐스트] - 문제적 캐릭터 / 문성근

 

 

 

 

 

 

 

 

 

 

 

 

그를 수식하는 많은 말들이 있다. 문익환 목사의 아들, 지식인 캐릭터, <그것이 알고 싶다>의 진행자, 적극적 정치 참여자…. 하지만 그 어떤 수식어 이전에 문성근은 '배우'이며 '우리 시대의 광대'다. 그를 통해 우리는 억압되었던 1970~80년대의 과거를 보았고, 한편으론 저항을 보았으며, 한국 사회의 단면을 포착했다. 그는 '문제적 영화'의 '문제적 캐릭터'였다. 그는 현실을 반영하는 배우임과 동시에, 현실의 적극적 참여자였다. 그는 영화계 안의 오피니언 리더였고 한때는 영화정책에 관련된 일을 하기도 했다. "민주공화국이며 대의민주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그 시스템이 제대로 굴러가게 하기 위해선 시민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16대 대선 선거운동에 참여했다. 영화계 안팎을 아우르는 이러한 활동은 사실 배우에게 그다지 '득'이 되는 일은 아니었다.

“연기 활동에 영향을 많이 미치긴 했지만, 되돌아보면 최선 다했고 떳떳한 부분이에요. 배우로서 손해가 있었다 하더라도, 뿌듯하게 생각하고요.” 그는 후회하는 대신, 지금을 더욱 튼실하게 채우기로 했다. 그리고 어떠한 압박감이 있었던 과거에 비해, 요즘 들어 연기가 더 재미있어졌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영화는 물론 공중파와 케이블TV 연극 무대를 아우르는 최근 그의 행보를 보면, 배우 문성근에게 ‘제2의 전성기’가 온 것은 아닐까 생각될 정도다.

 

 

 

눈물 흘리며 연기하는 나를, 뒤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더라고요

 

대학 시절 연극반 활동을 하긴 했지만, 연우무대를 통해 ‘직업 배우’가 되었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둘이었다. 8년 동안 꽤 유능한 대기업 사원이었던([101번째 프로포즈](93)의 문성근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그는, 잘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무대 위에 서기로 결심한다. “대단히 무책임한 결정이었죠.(웃음) 결혼도 했고 애도 있을 때였으니까요. 당시에 연극을 한다는 건, 먹고 살 수 없다는 얘기였거든요.” 그럼에도 배우가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좀 더 먼 미래에 대한 어떤 비전 때문이었다. “회사원 생활을 하다 보니, 거대한 기계의 부속품으로서 마모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러다 어느 시점이 되면 필요 없어지는 거죠. 조직체의 일원이 아닌, 나 자신이 판단하고 결정하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는 1985년에 연우무대에 들어갔고, 그때의 경험들은 지금까지도 문성근이라는 배우를 지탱해주는 힘이 된다. ‘배우 문성근’의 이름을 알린 첫 작품은 [한씨 연대기]. 이 연극으로 그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수상했고, 다음해 이어진 [칠수와 만수]는 엄청난 히트를 기록한다. “2년 정도 하고 나서 계산해봤더니, 연극으로 받은 돈이 회사 생활 할 때 월급보다 많더라고요.(웃음)”

하지만 그는 세 번째 작품인 [변방에 우짖는 새] 때 한계에 부딪힌다. 배우를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슬럼프였다. 이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들어온 최형인(현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교수. 한양레퍼토리 대표)은 문성근에게 큰 도움을 주었다. “배우로서 어떤 한계가 굉장히 일찍 온 셈이죠. 3년 만에 왔으니까. [변방에 우짖는 새]를 할 때였는데, 무대 위에서 발이 안 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내 역할을 반납하고 좀 더 얌전하고 작은 역으로 바꿨는데도 제대로 공연이 안 됐어요. 이때 최형인 교수가 연우무대에 왔는데, 그때 신영복 선생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에 있는 편지를 읽으며 독백 훈련을 했어요.” 최형인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억울하다’는 느낌만 가지고 책을 읽어보라고 했다. “세 문장 만에 눈물을 막 흘렸어요. 저도 깜짝 놀랐죠. 그런데 눈물 흘리며 연기하는 나를, 뒤에서 내가 지켜보고 있더라고요. 그때 그 경험으로 되살아난 거죠. 연기란 이런 거구나…. 그 기억에 의존해 지금까지 하고 있는 거고요.

 

 

 

 

가장 큰 아쉬움 남긴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 늘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

 

사실 처음 연극을 시작했을 때, 그는 영화배우가 될 거라고,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연우무대 극장에서 [오! 꿈의 나라]라는 16mm 영화를 상영했을 때, 그는 영화라는 매체에 대해 조금은 다른 생각을 가지게 된다. “객석이 꽉 찼고, 매표하는 사람이 곧바로 영사기를 돌리더라고요. 혼자서 몇 백 명을 감당하는 거죠. 팸플릿을 봤더니 제작비가 1,400만 원 정도라고 하고. 당시 연우무대에서 창작극 한 편 만드는 데 500~700만 원 들었는데, 히트작 아니면 배우 10명에 관객 5명일 때도 있었거든요, 효율 면에서 현저하게 차이가 나는 거죠.” 당시 연기를 ‘문화 운동’의 일환이라고 생각했던 그에게 영화의 대중성은 매력적이었다. 이때 그를 영화계로 이끈 사람은, 역시 연우무대 출신이었던 박광수 감독. 이미 연극 [칠수와 만수]를 1988년에 영화화해 좋은 반응을 이끌어냈고, 두 번째 영화로 [그들도 우리처럼](90)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을 만들 땐) 모든 면에서 연우무대의 연장선상이 있었기에 이상한 건 없었어요. 그런데 나중에 보니까, 당시로선 생소한 영화가 나왔더라고요.”

 

이후 그는 박광수 감독과 [그 섬에 가고 싶다](93),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95)을, 장선우 감독과 [경마장 가는 길](91), [너에게 나를 보낸다](94), [꽃잎](96)을 작업한다. [너에게 나를 보낸다]에서 공연했던 여균동 감독의 연출 데뷔작 [세상 밖으로](94)에도 함께 했다. 박광수, 장선우, 여균동 그리고 문성근. 그들이 함께 하며 1990년대에 만들어냈던 작품들은, 한국영화사에서 매우 독특하고 강렬한 풍경이다. “1987년 ‘6월 항쟁’ 이후 조금씩 검열이 완화되었고, 문민 정부 들어서면서는 더 풀렸죠. 예전에 만들지 못했던 영화를 만들자는 움직임이 있었고요. 그러면서 그들과 맞물렸죠. 지금 생각해보면, 1970~80년대의 억압에 저항하는 인물로 저를 쓴 셈이에요. ‘저 배우는 그 억압이 어땠는지 알고 표현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썼겠죠.” 연극 시절 훈련했던 ‘사실적 연기’도 그 감독들이 ‘쓰임새’를 느꼈던 요인이었다. 이 시절 출연작 중 그에게 가장 큰 아쉬움을 남긴 작품이 있다면 [경마장 가는 길]이다. 이 영화는 그에게 늘 “다시 해보고 싶은 작품”이었다. “R이라는 캐릭터를 지금 한다면, 그 인물의 더 깊은 곳을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것이 알고 싶다>그만 둔 건 내 영화 본 선배 손숙의 평가 때문

 

그리고 1992년, 그는 TV 시사 프로그램인 <그것이 알고 싶다>를 진행하기 시작한다. 긴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그의 이미지는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다. 그리고 그것 또한, 연기를 하면서 염두에 두었던 ‘문화 운동’의 일환이었을지 모른다. “당시 평균 점유율이 40퍼센트를 넘었어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그는 그 ‘잘나가던’ 프로그램을 그만둔다. 당시 [101번째 프로포즈]에 출연했는데, 그 영화를 본 연극계 선배 손숙의 짤막한 평을 읽고 느꼈던 점 때문이었다. “<그것이 알고 싶다>의 똑똑한 이미지를 갖고 있는 문성근이 그 역할을 하는 걸 보며, 영화 내용에 빠져들기까지 30분이 걸렸다”는 평이었다. “동업자도 이렇게 느끼니 일반 관객은 어떻겠나 싶어서, <그것이 알고 싶다>를 그만두었죠.”

영화배우가 된 1990년부터 6~7년 동안 그는 정말 바쁘게 뛰었다. 그가 받았던 연기상은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하지만 ‘영화계 현안’은, 그에게 연기만큼 중요한 비중을 지니고 있었다. 결정적 계기는 스크린쿼터 투쟁. “저는 연기에 집중하겠다는 생각으로 사실은 조금 거리를 두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때 영화계에서 쿼터를 왜 지켜야 하는지에 대해 설명하는데, 그 논리가 조금은 옹색하게 느껴지더라고요. 문화는 약하니까 지켜달라는 것이었죠.” 무역학과 출신이며 8년의 업무 경력도 있었던 그는, 쿼터라는 게 수출입과 독과점에 대한 문제라고 생각했고,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장문의 글을 썼다. 그리고 이창동 감독에게 보여주었다. “이 감독이 첨삭을 했는데, 소설가다 보니 문장이 유려해졌어요. 너무 잘 쓴 거예요.(웃음) 그래서 ‘난 못 내겠다’고 그랬더니 이창동 감독이 짐짓 화를 내더라고요. 일 시켜놓고 무슨 얘기냐고.” 결국 <씨네 21> 독자투고란에 글이 실리게 되었고, 시위 연단에 오르게 되었으며, 그는 ‘얽히게’ 되었다.

1999년에 영화진흥공사가 영화진흥위원회로 바뀌었을 때, 그는 부위원장 직을 맡았다. 한때나마 영화 정책에 관여했던 입장에서, 그는 현재 한국영화의 상황이 안 좋아진 것에 대해 후배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다. 특히 대기업에 의해 제작과 배급과 극장을 아우르는 ‘수직 계열화’가 이루어지는 걸, 보면서도 막지 못한 것이 너무 아쉽다. “일단 위기의 원인에 대해 공유해야 할 것 같아요. 거품이 있었다, 제작비가 과다했다, 부가수익 시장이 죽었다… 이런 부분은 영화계 스스로도 반성하고 고쳐나가려는 것 같아요. 비교적 덜 언급되는 부분은 수직 계열화 문제죠. 영화산업 구조 안에서 힘이 한두 군데 기업으로 집중되니까, 이런 시스템 안에서는 창의성이 충분히 살아나기 힘들어요.” 그럼에도 희망을 갖는 건 역시 ‘사람’이다. “워낙 열정적인 인력이 계속 나오고 있다는 점이죠. 좀 더 절박한 마음으로 치열하게 작품을 해나가면, 여전히 우리 관객은 우리 영화를 아껴준다고 생각해요.”

 

 

 

정치할 생각으로 16대 대선 참여한 거 아니었어요. 그래서 대선 후에는 주로 산에 다녔어요

 

연기자로, 영화계 일로 동분서주했던 1990년대에 비해, 2000년 이후 그와 영화계의 고리는 조금은 느슨해졌다. 16대 대선 선거운동에 참여했던 기간이었다. “그때 노무현 후보를 지지하면서, 당선이 되더라도 그 어떤 혜택도 보지 않겠다고 공언했었거든요. 시민이 정치에 참여해야 한다는 확신으로 자원봉사를 했던 거니까요. 선거 끝나고 정치가나 행정가를 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없다고 여러 번 이야기했는데, 사람들이 믿질 않았죠.” 입각설부터 총선 출마설까지, 정말 많은 이야기가 떠돌았던 그때였다. “세월이 증명하는 방법 밖엔 없었죠. 5년이 흘러야 확인되는 거니까. 그러면서 ‘아예 내가 안 보이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고 산에 다녔는데, 그러다 보니 연기를 하고 싶은 생각까지 안 들더라고요. 그래서 정말 참여 정부 기간엔 거의 연기를 안 했어요.”

하지만 결국 그의 ‘본업’은 배우일 수밖에 없었고, 한두 작품씩 다시 시작하면서 그는 과거와 달라진 그 무엇을 발견한다. “1990년대엔 어떤 압박감이 있었어요. 배우로서 그런 걸 가지지 말아야 하는데, 제가 배우로서 그릇이 작았던 탓인지…. 그런데 그런 압박감에서 자유로워졌어요. 연기도 훨씬 재밌어지고. 이제 많이 해야겠다 싶은 생각도 들고요. 이유는 모르겠어요. 아무튼 재밌어요. 뭔가 해야 한다, 내가 끌고 가야 한다, 영화의 흥미를 유지시켜야 한다, 캐릭터를 다양하게 보여줘야 한다…. 그런 것에 눌려 있었던 것 같아요. 그냥 충분히 즐기면 되는 건데.” 특히 캐릭터에 접근하는 방식이 훨씬 단순화됐다. “이창동 감독은 ‘장님 문고리 잡는다’고 그러는데, 재미있는 표현이에요. 캐릭터에 대해 ‘한 마디로 어떤 사람이냐’ 이걸 먼저 접근하고 그 다음 살을 붙이는 게, 인물에 접근하는 데 편하다는 거죠. 핵심이 뭐냐는 것.” 최근 작업한 [실종](09)의 ‘판곤’이라는 캐릭터는 그러한 과정을 통해 만들어졌다. “판곤을 ‘나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 외엔 아무 관심도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공동체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끊고, 내 욕망만 중심으로 가는 사람. 이걸 핵심으로 잡은 거죠. 그런 후에 김성홍 감독과 장면마다 이야기하면서 만들어 나갔고요.”

 

 

 

최근엔 작품 네 편 찍었는데, 캐릭터 4개 번갈아 몰입… 하니까 되더라고요

 

최근 문성근은 1990년대보다 훨씬 더 바쁘게 지냈다. 의도하진 않았지만, 영화 [실종]을 촬영하는 기간에, 연극 ‘변’과 TV 드라마 <신의 저울>과, 케이블TV 드라마 <크라임>까지 총 네 편의 작품이 겹쳐 있었다. “재밌기도 했고, 굉장히 피곤하기도 했고. 영화 촬영 끝나는 다음 날 바로 감기가 걸리더라고요. <실종>의 김성홍 감독과 농담처럼 한 얘기가 있는데, 제가 4년 동안 등산 다니면서 축적해 놓은 체력으로 버텼다는 거죠.” 한쪽 촬영이 끝나고 이동하는 차 안에서 잠에 들면서 방금 했던 캐릭터를 잊어버리고,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다른 촬영장으로 향하면서 그날 연기할 캐릭터에 조금씩 젖어 들었던 과정, “네 작품이 정말 판이한 캐릭터들이었는데, 하니까 되더라고요. 재밌는 경험이었어요. 다시는 하고 싶지 않지만.(웃음)”

연기뿐만 아니라 그는 내면적으로도 과거에 비해 훨씬 편안해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정겹고 좋아졌다. “인생이 그런 것 같아요. 어떤 사람의 삶이라는 게, 욕망의 크기와 욕망이 발현되는 분야와, 시대와 맞아 들어가는 타이밍 같은 것에서 결정되는 거죠. 나도 모르는 사이에 방향이 결정되는 것 같아요. 저로서는 늘 매 시기마다 열심히 판단하고 열심히 고민하고 열심히 산 거였고요.” [실종] 이외에도 TV 사극 [자명고] 등 우리가 ‘연기자 문성근’을 만날 수 있는 시간은, 부쩍 늘어났다. 최근엔 홍상수 감독과 디지털 단편인 [첩첩산중] 작업을 했다. “홍상수 감독은 그냥 풀어놓는 걸 주문하는데, 연기에 있어 어떤 극단일 수 있어요. 홍상수 감독과 작업하다 보면, 감독이 이 얘기를 어떻게 풀어나갈지에 대한 재미와 기대가 있어요. 그리고 내가 감독이 주문하는 자연스런 연기를 얼마나 해낼 수 있는지에 대한 재미도 동시에 있고.” 1~2년 전에 촬영한 [작은 연못]도 관객과 만날 채비를 하고 있다. ‘노근리 사건’을 소재로, 아마도 “국내 최고령 데뷔 영화감독”이 될 연극 연출가 이상우의 첫 작품이다. “기술 시사회에서 아직 완성되지 않은 걸로 봤는데, 시를 쓴 것 같은 느낌을 받았어요. 마을 주민 50명이 주인공인데, 배우 한 사람 한 사람이 정말 혼신의 힘을 다해 하고 있다는 생각에 ‘참 드문 영화다’라는 생각도 들었고. 송강호, 문소리, 박원상, 김뢰하, 강신일 등 여러 배우들이 열심히 해서 참 좋았어요. 그리고 경탄할 만한 아름다움이 있는 영화예요.”

한때 구체적으로 생각했던 ‘영화감독’에 대한 꿈은, 연기가 재밌어지고 자유로워진 지금으로서는 완전히 접은 상태. “20년 넘게 하다가 이제 재미있어진 걸 되돌리고 새로운 수업을 하는 건 낭비라는 생각이 들었죠.” 마지막으로 ‘궁극적으로 남고 싶은 배우상’에 대해 묻자 그는 배우와 관객과의 ‘소통’에 대해 이야기한다.

“요즘은 소통의 통로가 많이 늘어난 시대이기도 하면서도 소통이 쉽지 않은 시대죠. 조금 묘한 표현이긴 한데…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반영할 수 있는 배우? 사회에 대한 생각을 깊게 해서 자기 스스로를 넓게 만들고, 그걸 전달하되 대중적으로 정서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배우, 그래서 관객과 가깝게 지낼 수 있는 배우. 아마 ‘꿈의 배우’겠죠. 영원히 이루지 못할 텐데…. (꼭 내가 아니라도) 그렇게 되는 배우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거죠.”

 

김형석 / 영화 월간지 <스크린> 전 편집장

고려대 서양사학과와 동국대 영화과 대학원을 마쳤다. 시네마테크 문화학교서울<현 서울시네마테크>에서 영화 일을 시작했으며 2000년 <스크린>에 입사한 후 부터 영화 저널리스트로서 살고 있다.

사진 김덕화 동영상 OBS경인TV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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