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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배우 김혜자 -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본문

강사님과/스타강사/유명강사

아름다운 배우 김혜자 -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

파인드강사 2013. 2. 7. 16:31

 

 

강사섭외/기업특강/명사섭외/유명인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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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탤런트, 영화배우)

경력

2010.09 2010 서울G20 정상회의 준비위원회 민간위원

1975~2002 제일제당 전속모델

수상

2011 제1회 아름다운 예술인상
2011 제30회 세종문화상 사회봉사부문
2011 미국 LA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
2010 제36회 로스앤젤레스영화비평가협회 여우주연상
2010 월드비전 국제총제 특별상
2010 제4회 아시아필름어워드 여우주연상
2010 제7회 맥스무비 최고의 영화상 최고의 여자배우상
2010 제1회 올해의 영화상 여우주연상
2009 제12회 디렉터스 컷 어워드 올해의연기자상
2009 제3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 여우주연상
2009 스타일아이콘어워즈 뷰티풀셰어링상
2009 제18회 금계백화영화제 해외부문 여우주연상
2009 제18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
2009 제29회 한국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2009 제회 부산영화평론가협회상 여우주연상
2009 제45회 백상예술대상 TV부문 대상
2008 KBS 연기대상 대상
2003 제14회 위암 장지연상
2003 제2회 스타 선행 대상
2003 제1회 페미니즘 대중문화 예술대상
2002 MBC 명예의 전당
2001 MBC 연기대상 대상

 

 

▶ 김혜자는 '인생에 주어진 의무는 행복' 뿐이라고 했던 헤르만 헤세의 시를 인용하며, 그는 아마 아프리카 소녀 에꾸아무를 모르니까 그런 시를 썼을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에는 10년이 넘게 지구 곳곳에서 구호활동을 벌여온 김혜자가 체험한 전쟁과 가난, 기아의 현장이 담겨있다. 한국판 <토토의 눈물>.

 

 

 

배우 김혜자

귀여운 여인

“올렌카는 언제나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었으며,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유형의 여인이었다. 만약 다른 여자의 경우였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을 테지만 웬일인지 올렌카를 비난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안톤 체호프의 단편 <귀여운 여인> 속의 두 문장이다. 귀여운 올렌카에게 우주의 중심은 사랑하는 남자에 따라 변한다. 극장주와 결혼하고는 연극에 미치고 목재상과 재혼하자 연극은 까맣게 잊고 나무박사가 된다. 남편이 죽고 유부남 수의사에게 마음을 빼앗기니 가축에 빠져들고, 고향으로 떠났던 수의사가 가족을 데리고 이웃으로 이사오자 나이 든 올렌카는 속도 없이 그의 어린 아들에게 넋을 잃고 모정을 쏟는다.

 

 

 

배우 김혜자는 올렌카를 닮았다. 몰입의 대상이 다를 뿐이다. 이 순간 끌어안고 있는 작품, 지금 끌어안고 있는 굶주리고 깡마른 아이들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다. ‘한국의 어머니’란 칭호를 스스로 쑥스럽게 여길 만큼, 그녀는 대본을 손에 쥐면 사방의 요동과 소음으로부터 자기를 단절시키며 살아왔다. 김혜자의 작고한 남편은 아내에게 “당신은 혼자 살아야 하는 사람인데 결혼을 해서 이렇게 부대끼는 거요. 음식 안 주면 고대로 앉아 굶을 사람이오”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외출을 성가셔하고 일 없는 날이면 방 안에서 홀로 우두커니 시간과 노는 그녀가, 힘든 연기에 몸을 던지고 도움이 필요한 저개발국 아이들을 찾아 지구 곳곳을 헤맬 수 있는 까닭은 아마도 그 두 가지 일에 몰두하는 동안은 자기를 깡그리 잊을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혜자의 오랜 친구인 두통도 그때만큼은 신통하게 잠잠해진다.

최근 김혜자의 외곬 심장을 점령한 것은 <마더>의 가련한 엄마다. 영혼을 팔아도 아깝지 않은 아들 도준의 살인혐의를 벗기기 위해 지옥까지 머리를 풀어헤치고 맨발로 달려가는 그 여자. <마더>를 찍는 동안 김혜자는 두통약을 찾지 않았고 엄습하는 배고픔에 거의 난생처음 식사시간을 먼저 물었다. <마더>의 주인공 혜자는 엄마라고 쓰고 어미라고 읽어야 할 것 같은 인물이다. 어미는 징그럽고 독하고 때로는 어두울 수밖에 없다. 봄날의 양지처럼만 보이는 엄마라는 이름 속에는 이기적 생존본능과 종족보존 욕망의 끝이 매복해 있다. 봉준호 감독이 참조한 김혜자의 전작이 MBC 특집극 <여>라는 점도 시사적이다. <여>는 아이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유괴한 아이를 친딸처럼 애지중지 키우다가 발각되는 처절한 드라마다.

김혜자는 예민해서 압도적이다. 정교하게 만들어진 풍경(風磬)처럼 미풍에도 울린다. 창호지처럼 섬약한 음색은 흥분에 곧잘 뒤집히고 회한에 찬 니오베의 표정을 하다가도 히스테리컬한 비명을 지른다. 각본이 설득력있는 맥락만 잡아주면 그녀가 감당 못할 감정의 낙차는 없다. 특집극 <홍소장의 가을>에서 은퇴한 파출소장의 아내로 분한 그녀는 어깨가 처진 남편과 평상에서 소주를 홀짝이다 기습 키스를 한다. 그리고는 다음 순간 고개를 돌려 울컥인다. 일관성없는 것이 김혜자 연기의 일관성이다. 몰입에서 또 다른 몰입으로 옮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의 동공은 거짓말을 못한다는데, 인터뷰를 위해 비 내리는 창가에 마주 앉은 그녀의 먹빛 눈동자 안에는 수시로 별이 떴다. 이어지는 문답은 ‘안단테 칸타빌레’로 읽어야 한다. 김혜자의 말투에 맞추어, 조금 느리게, 노래하듯이.

-이번 주일은 온통 흐리고 비만 내리네요. 전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는 편이라 힘들었어요.
=맑은 날이 좋아요? 저는 너무 화창한 것보다 이 정도 날이 좋아요. 그냥 자면 되니까. (웃음) 화창한 날은 누가 뭐라고 안 그러는데도 마음이 시끄러워져요.

-선생님 댁 앞에 꽃이 많다고 들었는데, 그래서 더 왁자할까요? 꽃이 많이 피었죠?
=나는 살구꽃 필 때가 좋아요. 커다란 나무에 조그만 꽃들이 자욱하게 서려서 멀찌감치 보면 분홍이 연하게 떠올라요. 한 2, 3일 행복하게 해주고, 우리가 모르는 미풍에도 후룩 져요. 무게도 안 느껴질 듯한 자그마한 새가 앉아도 떨어지죠. 눈송이보다 더 가벼운, 쬐끄만 나비들이 내려오는 것처럼. 지금은 라일락이 한창이에요. 담 밖으로 가지가 나도록 라일락을 많이 심었어요. 우리 집 앞 지나는 사람들 행복하게 해주고 싶어서요. 행인들이 가지를 꺾어가기도 해요.

-서교동에서 오래 사시다가 현재 집에서도 10년 넘게 사셨죠. 한곳에 마음을 두면 쉽게 옮기지 않는 편이십니까?
=변화를 별로 안 좋아해요. 새로운 사람 사귀는 것도 쉽지 않아요. 서교동에서 20년 넘게 살았는데 자동차 통행이 많아지면서 밤에 끼익 하고 브레이크 밟는 소리가 나면 “누가 죽었을까?” 두근거리고 불면증이 생겼어요. 병이 날 것 같아 다른 골목으로 이사했는데 집 앞에 5층짜리 오피스텔이 서더라고요. 우리 마당을 내려다볼 것 같아 싫었는데, 글쎄 그 오피스텔의 한 방이 봉준호씨가 속한 연세대 영화동아리방이었대요. 정원에서 내가 강아지랑 노는 것도 보고 담 앞에서 기념사진도 찍었다네요. (좌중 웃음)

 

 

-<엄마가 뿔났다> 찍는 동안 몸이 편찮으셨고, <마더> 촬영 마치고도 코피를 흘리셨다고 들었습니다. 정신적, 육체적으로 후유증이 있으신가요?
=<엄마가 뿔났다>와 <마더> 사이 시간이 일주일뿐이었어요. “선생님 충분히 쉬시다 몸이 괜찮으시면 촬영해요. 저희는 다른 장면부터 먼저 찍고 있을게요.” 그랬지만 찍고 있는데 내가 어떻게 쉰담? (웃음) 아플 새가 없었어요. 봉 감독이 <마더> 이야기를 5년 전에 처음 꺼내고 잊어버릴 만하면 전화를 하고 연극할 때 찾아오고 그랬거든요? 그러면서 그 여자를 끊임없이 나한테 심어줬어요. 하도 오래 그러니까 마치 영화 다 찍어 개봉까지 하고 나한테서 다 흘러가버린 일처럼 생각될 정도였죠. <마더>의 혜자가 이미 내 안에 그렇게 있었고 감독이 내 안에서 그 여자를 계속 자라게 만들어줘서 일주일 만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거 같아요. 그렇게 촬영에 들어갔는데, 저는 이번에 우리 산하가 이렇게 아름다운지 처음 알았어요. 먼 나라는 가도 우리나라 구석구석은 가본 적이 없었거든요. 피로가 있었다 해도 치유를 받았어요.

봉준호 감독의 ‘5년 구애’

-봉준호 감독님은 젊은 분인데도 노련하고 집요하시죠?
=영화가 들어가기 기다리는 몇년 동안 내가 “난 자꾸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어떻게 서른도 안된 아들의 엄마로 보이겠냐. 내게 말 꺼낸 것 때문에 무리하지 말아라. 나는 당신처럼 젊고 유능한 감독이 나랑 일하고 싶어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하다”고 했죠. 나중에 다른 분께 들어보니 나한테 그런 말을 들은 날은 영화사 들어가서는 머리를 쥐어뜯고 그렇게 힘들어했다네요. (폭소) 난 사람 많은 데를 싫어해 극장에도 가지 않거든요. 남들 다 본 영화를 1년 뒤에 비디오로 보는데 <살인의 추억>도 비디오로 보고는 “어머, 꼭 옛날에 본 근사한 불란서영화 같으다” 했죠. 그런데 우연히 만난 백지연씨가 봉 감독 인터뷰를 했는데 1시간 내내 제 이야기가 절반이었다고 전해주는 거예요. 그리고 또 극동방송 <김혜자와 차 한 잔을>이라는 프로그램을 함께하는 작가가 신문 기사를 오려왔는데 큰 글씨로 “김혜자 선생님과 일하고 싶어”라고 써 있었어요. 배우로서 얼마나 행복하던지.

-구애가 전해질 때까지 말을 뿌리고 다니셨네요. <서동요>의 서동이 선화 공주를 얻은 전략과 비슷한데요. (웃음) <마더>에는 엄마가 신들린 듯 춤을 추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 대목에서 영화의 느낌이 확 왔을 것 같은데요.
=봉 감독이 직접 가르쳐줬어요. 별 춤을 다 춰 보이더라고. 그중엔 겨드랑이 털 뽑기 춤도 있었어. (시범을 보인다. 좌중 폭소) 대학 때 농활 가면 아주머니들이 일 끝나고 막걸리 먹고 춤을 췄대요. 젊은 봉준호씨는 나가떨어지는데, 아줌마들은 어찌나 에너지 안배를 잘하는지 슬쩍슬쩍만 움직이다 또 막 격렬하게 추다가 하면서 몇 시간이고 지치질 않았대요. (웃음) 나중에 영화사에서 관광버스 태워줘서 아줌마들 춤추는 것도 구경했고 같이 탄 봉 감독, 스탭들도 다 나가서 나 구경하라고 추어보였어요. 그렇게 춤사위를 익혔고, 촬영할 때도 혼자 추기 멋쩍어서 앞에 있는 스탭들도 다 같이 춰달라고 부탁했지만 정작 연기하면서는 그분들이 내 눈에 보이지 않았어요.

-봉준호 감독님은 <마더>를 소개하면서 가족 안의 네 가지 관계- 모자, 모녀, 부자, 부녀- 가운데 모자 관계가 갖는 특별함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선생님은 슬하에 아드님, 따님을 다 두셨는데 어떻게 느끼세요?
=봉준호 감독이 툭툭 던지는 말들 가운데 내가 깊이 생각해야 말들이 있어요. “선생님, 아들은 자기 뱃속에서 열달을 키워서 내보낸 이성이지요?” 이래. 듣고보니 진짜 그렇구나. 이성이구나 싶었어요. “딸 하곤 다르지요?” 하더라고요. 시나리오를 받았을 때 그리스 비극을 연상했어요.

-확실히 오이디푸스와 이오카스테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감독이 생각하면서 썼을 거예요. 그래서 내가 시나리오 많이 돌리지 말라고 그랬어요. 굉장히 숨은 얘기가 많은데 표현이 심플하니까 대본만 읽은 사람은 잘 알아차리지 못할 거 같아서 그랬어요.

-흔히 <마더>에 관해 이야기할 때 “김혜자 선생이 보여준 어머니상과 상반되는”이라는 구절을 쓰는데, 어머니에 대한 통념이, 초인적 희생과 무조건적인 유대를 뜻한다면 <마더>의 마더는 그 반대가 아니라 오히려 그 극단까지 밀어붙인다는 점에서 특기할 만한 작품이 아닐까 싶은데요.
=규정짓는 걸 사람들이 좋아하는구나 싶어요. 엄마의 본성은 똑같아요. 자식을 위해 죽을 수 있는 건 아버지도 아니고 엄마뿐이라잖아요? 엄마의 본질은 같은데 그 엄마가 처한 상황 때문에 어떻게 모성을 표현하느냐가 다른 것이지 변신이고 뭐고 없어요. 엄마 연기가 참 어려워요. 누구나 엄마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역이거든요. 엄마를 다르게 하려면 그를 다른 상황 속에 가져다놓는 시나리오가 있어야지 배우가 무슨 가면을 쓰고 나올 수도 없고요. (웃음) 실제 드라마 안에서도 엄마 역은 힘들어요. 비중이 많은 날은 아주 파김치가 돼요. 아들, 딸, 며느리, 사위 챙겨야지 남편 시중들고 손자들도 돌봐야지 부엌 들락날락해야지.

<마더> 시나리오 받고 그리스 비극 떠올려

-혜자는 착란에 가까운 모성의 상태를 보여주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내 살이 네 살이고 네 살이 내 살인 경지랄까요.
=전 이렇게 생각했어요. 이 여자는 근본적으로 삶이 불안한 여자야. 그래서 항상 눈이 평화롭지 않을 거야. 첫 장면부터 불안하게 아들을 지켜본다고 써 있거든요. 보통이라면 눈앞에서 친구와 노는 아들이 불안할 필요가 어디있어요. 영화에 나오지 않는 그 여자의 남편에 대해서 상상도 많이 했는데, 결론은 어떠해도 좋다는 거였어요. 아주 사랑한 남자였어도, 아니면 도준이가 겁탈당해 낳은 아이라도 상관없어요. 그저 도준이가 그 여자 속으로 낳은 아이이고 목숨처럼 알고 키운 애다, 남편이란 그애를 낳기 위해 필요한 존재로만 생각하기로 했어요.

-영화와 TV가 여러 차이가 있지만 일단 크게 보이잖아요? <마더>의 홍경표 촬영감독께서 이번에 선생님의 눈과 얼굴을 잘 표현하려는 목적으로 특수한 렌즈(아나모픽 기종 HAWK 렌즈)를 쓰셨다고 들었습니다. 모니터를 통해 전에 보지 못한 본인의 모습을 보신 적이 있나요?
=무안해서 모니터 안 볼 때도 있었는데, 길이나 벌판에서 찍다보니 모니터 있는 천막 안이 따뜻해서 보게 됐어요. (웃음) 원래 내가 걱정을 했거든요. 그랬더니 감독은 상관없다고, 보이는 대로 찍겠다고 했어요. 영화를 찍으면서 봉 감독 말을 이해했어요. 아주 할머니가 되면 곤란하겠지만, (살짝 웃으며) 지금도 할머니지만, 이 정도는 괜찮겠다. <마더>는 그리고 저 엄마가 도대체 몇살인지 따질 겨를이 없는 영화니까요. 그런데 어떤 장면에선 정말 내가 봐도 깜짝 놀라게 늙어보이는 거예요! (폭소) 어머, 이게 뭐야 그랬다니까요. 나이 먹으면 윤곽이 허물어진다잖아요. 고개를 기울이는 장면이 있는데 난 너무 충실하게 수그린 거야, 그걸 그대로 찍었어 세상에, 자기들은 영화가 어떻다는 걸 잘 알면서 좀 귀띔이라도 해주지, 나쁜 사람들이야. (웃음)

-어린 시절 살던 집이 영화 촬영을 할 정도로 크고 손님이 많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공간에 대한 기억은 남아 있으신가요?
=지금 퇴계로와 서울역이 통하는 길이 우리 집이었어요. 거실이 한 200평쯤 됐어요. 부자여서가 아니라 아버지가 미 군정 시절 재무부 장관에 해당되는 일을 하셔서 살게 된 사택이었어요. 만날 손님들이 와서 파티를 했고, 공원인 줄 알고 놀러들어오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였어요. 영화 촬영은 아마 식구들이 배우 구경하려고 빌려줬을걸요? 서양 사람들이 만날 모임에 와서 “닥터 김!”하고 아버지를 부르던 소리, 부부동반 댄스 파티의 음악소리, 그 음향들만 기억이 나요.

-김혜자 선생님과 어머니라는 개념이 가깝다보니 선생님의 어머님에 대한 기억도 궁금합니다.
=어머니는 열아홉살에, 열일곱 아버지에게 시집왔어요. 딸 둘 낳고 아버지가 훌쩍 유학을 떠나 17년 만에야 돌아오셨고 그 다음에 제가 태어났죠. 유학 떠나던 날 “냉수 한잔 주시오” 해서 남편과 흘깃 마주친 눈길 하나의 기억으로 그 시간을 견디셨대요. 어머니는 무척 미인이셨어요. 친가가 전북 군산의 거상이었는데 사랑방에 하도 손님이 들락날락하니까 아침마다 상을 열여덟번 차렸대요. 딸 둘 키우랴 살림하랴 외로울 새가 없어 버티셨겠죠. 그렇게 힘들게 지내다 폐결핵에 걸려 선교사들이 세운 대전의 병원에 입원하셨는데 의사인 총각 선교사가 우리 엄마에게 반한 거예요. 정식으로 어른들께 말씀드리고 결혼하고 싶다는 말까지 나왔대요. 어머니는 말을 모르니 그저 그가 들어오면 돌아눕기만 했대요. 집에서 그 일을 알고 부랴부랴 퇴원시켰죠.

-선생님이 보신 것은 아버지가 돌아오신 뒤의 어머니 모습이셨을 텐데 행복해 보이셨나요?
=힘든 세월을 보내셔서 그런지 아버지가 오신 뒤에도 그리 활짝 웃는 모습은 못 봤어요. 늘 아프셔서 엄마를 생각하면 “아유 머리야…” 하는 소리를 제일 많이 들었던 기억이 나요. 제 두통이 엄마를 닮은 거예요. 우리 엄만 왜 저리 머리가 아프고 얼굴이 흴까 생각했죠. 저는 17살 터울의 언니 손에서 거의 자랐어요.

아프리카 나온 영화만 보아도 눈물이…

-월드비전 일을 17년째 하고 계십니다. 물론 좋은 일이지만 스스로에게 매우 고통스러운 일이기도 할 텐데요. 종교인이신데 신을 원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참상을 자꾸 보아야 한다는 점만 해도 그렇잖아요?
=전 지금도 확실하게 하나님을 이해할 수는 없어요. 처음에 갈 때는 그렇게 비참한 줄 모르고 그저 가난한 나라에 여행간다는 마음 정도였어요. 당시 아프리카 여행은 쉽지 않았으니 동물도 많고 재미있겠다는 생각도 없지 않았죠. 그런데 제가 그렇게 숱하게 아프리카를 다니면서 본 야생동물이라곤 저 멀리서 얼룩말 한 마리 뛰어가는 것 본 게 전부예요. 기근이 심하고 내전이 끝난 직후라 풀도 없고 가시나무만 있는 지역들인데 거기 동물이 왜 오겠어요. 정말 하나님이 이러실 수는 없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다신 안 가리라 했는데 어느새 정신차려보니 내전소식만 들리면 평소에 보지도 않던 <AFKN> 뉴스를 틀어보고 있더라고요. 알고는 못 갔을 거예요. 이제는 다큐멘터리 등으로 많이 알려졌지만.

-선생님이 많이 알리셨죠.
=아무리 왼손 하는 일,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하지만 저는 그럴 수가 없어요. 배우기 때문에 알리는 것이 하나님이 제게 주신 역할이에요. 우리나라 사람들, 참 따뜻해요. 큰돈 내놓으라면 도망가지만 작은 돈 보태달라면 낼 준비가 언제든 돼 있어요. 다만, 창구역을 하는 기관의 운영이 미흡했던 거죠.

-<꽃으로도 때리지 말라>라는 책에서, 품에 안은 아이가 내 몸에 새겨진 검은 문신 같았다는 표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아이의 가벼운 체중과 떼낼 수 없는 느낌이 그대로 전해졌어요.
=너무나 부피가 없고 가벼워요. 맞아요. 떼어낼 수가 없었어요. 떼어낼 수가 없어서 자꾸 다니는 거예요. 애들을 위해 뭔가 하지 않으면 죄를 짓고 할 일을 방치하는 기분이 돼요.

 

-대중매체에서 보는 아프리카의 이미지를 보면 어떤 느낌이 드세요?
=소말리아 사태를 찍은 <블랙 호크 다운>을 보며 참 마음이 아팠어요. 감독이 잘 만들었어요. 미군이 흑인들을 무시하고 30분이면 작전 끝이라고 덤볐는데 끝까지 저항하잖아요? 그 사람들에겐 특유의 몸짓이 있어요. 총을 쏠 때 어깨를 이렇게 돌리는 그 몸짓만 봐도 아프리카가 그리워서 눈물이 났어요. (목이 메어) 방글라데시, 인도,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제가 간 모든 곳의 아이들이 다 예쁘지만 이상하게도 아프리카의 피부 검은 그 아이들이 제일 그립고 예뻐요

 

-OBS에서 <김혜자의 희망을 찾아서>라는 토크쇼를 진행하셨습니다. 예민한 분에게는 남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 꽤 힘들 수도 있었을 텐데요.
=인터뷰할 분이 오시면 제가 부탁을 했어요. “제가 이런 일 하게 생겼나요? 도와주세요. 어찌 해야 할지 모르겠으니 제가 말을 못하고 당황하면 선생님께서 이야기 좀 해주세요” 그러면 대부분 묻지도 않는데 나서서 먼저 이야기해주세요. (웃음) 근데 나를 그 프로그램에 섭외한 주철환 전 OBS 사장은 어쩔 줄 모르는 것도 내 장점이고, 지루할 때 얼굴에 표나는 것도 매력이라는 거예요. 아유, 하게 만드려고 별게 다 매력이래요.

-프로그램 중 김중만 사진작가와 인터뷰하실 때 선생님이 영정사진을 매년 바꾼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사람들이 마지막에 바라볼 내 얼굴이 어떤 것인가 계속 상상하시는지요?
=나는, 모든 사진을 그렇게 생각해요. 내가 신경 안 쓰는 거 같으면서도 굉장히 신경을 쓰나봐. 제일 배우 같고 아름다운 사진이 영정으로 놓여 있었으면 좋겠어요. 거기 모인 사람들에게 슬픔과 더불어 저 사람을 내가 알았었다는 기쁨을 같이 줄 수 있는 얼굴이었으면 좋겠어요.

 

씨네21 [김혜리가 만난 사람] 배우 김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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