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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1위의 인문학 강연자- 김상근교수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파인드강사]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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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기1위의 인문학 강연자- 김상근교수 [특강/강사섭외/유명인/명사/파인드강사]

파인드강사 2013. 2. 15. 11:25

 

강사섭외/기업특강/명사섭외/유명인 초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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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경영/신학/성공/종교/철학/미학/교양]

 

 

 

 

김상근 교수
소속 : 연세대학교 (부교수)
학력 : 프린스턴신학교대학원 선교학,
종교학 박사
경력 :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부교수
플라톤아카데미 책임교수
2004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조교수
1997~2001 미국 프린스턴신학교대학원 강사

 

 

 

 

 

 

 

 

 

 

 

메디치 가문에서 배우는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간단하게 설명해주세요.</dt><dd>메디치 가문의 사람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얻어 세상을 얻었습니다. 물질이 우선이 아니라 사람이 우선이었고, 사람의 마음에 창조와 열정의 바람을 불러일으켜 새로운 시대를 창조했습니다. 무엇보다 그들은 신의를 지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한번 맺은 인연을 소중히 여기며,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처신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단호한 결단이나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는 한치의 주저함도 없이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을 정확하게 실천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 시대를 종결시킨 최고의 예술가였습니다. 그런데 이 미켈란젤로가 메디치 가문의 양자였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뭅니다. 천하의 미켈란젤로가 탄생하게 된 이유는 메디치 가문의 아낌없는 지원과 전폭적인 후원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미켈란젤로가 추구했던 아름다움의 극상은 메디치 가문이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에 탄생한 것입니다.

 

 

요즘 ‘메디치 가문’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축적한 유럽 최고의 귀족 가문이에요. 특히 중국에서 메디치 가문에 대한 연구가 많은데, 돈을 어느 정도 벌고 나니까 세계를 경영하기 위해서는 돈보다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한 시대를 이끌었던 메디치 가문은 어떤 가문이었을까요? 메디치 가문은 평범한 중산층에서 출발해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통치했습니다. 만약 피렌체에 메디치 가문이 없었다면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생겨나지 못했을 겁니다. 이 가문이 세상을 바꿀 수 있었던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사람의 마음을 얻었기 때문’이죠. 지금부터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는 비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미켈란젤로, 마키아벨리 등 천재들의 든든한 후원자
먼저 메디치 가문 사람들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면, 메디치 가문의 설립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1360~1429)의 아들 코시모 데 메디치(1389~1464)는 ‘나라의 아버지’라 불리는 사람이었어요. 대단한 통찰력을 가진 현자였죠. 이 사람 덕분에 메디치 가문의 문화가 2대째부터 유럽 전역에 퍼지기 시작했어요. 그의 아들 피에로 데 메디치(1416~1469)는 아버지의 그림자에 가려 항상 슬픈 사람으로 살아야 했지만 그다음 아들 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는 위대했어요. 너무 위대해서 별명조차 ‘위대한 자 로렌초’로 불렸죠. 메디치 가문이 최정점을 향해 가던 시기였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너무 뜨니까 정적이던 팟치 가문 사람들이 죽이려고 합니다. 1478년, 부활절 아침에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하려 했는데, 로렌초 데 메디치 대신 동생 줄리아노 데 메디치가 칼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맙니다.
줄리아노가 죽고 난 뒤 장남이 또 피에로라는 이름을 가지는데, 1494년에 프랑스가 침공했을 때 도망을 갑니다. 가문이 몰락할 뻔한 위기의 상황에서 놀랍게도 그 둘째 동생 조반디가 교황 레오 10세가 되죠. 로렌초 데 메디치의 딸인 카테리나는 교황 레오 10세를 작은할아버지로 두어 태어날 때부터 권세를 가졌어요. 나중에 프랑스 왕가로 시집을 갈 때는 줄리아노의 아들인 교황 클레멘트 7세로부터 도움을 받기도 했죠. 시집을 간 뒤에는 아들, 아들, 아들을 차례로 왕으로 만들고, 딸은 당대 최고의 권력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펠리페 2세에게 시집보냈습니다. 자기 며느리들은 유럽의 왕실에서 다 데리고 와서 왕가 다섯 개를 치마폭에 감쌌죠.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이끈 천하 여걸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어떤 문화를 남겼을까요. 지금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오페라를 메디치 가문에서 처음 만들었습니다. 흰색 테이블보를 깔고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는 유럽의 식사 예절도 메디치 가문의 예법이었어요. 메디치 가문에서 이 예법을 전파하기 이전에는 왕족도 음식을 손으로 집어 먹었다고 합니다. 항상 치마만 입어야 했던 여자들이 바지를 입게 된 것도 메디치 가문 때문이었습니다. 카테리나가 프랑스에 시집을 간 뒤 말을 탈 일이 많았는데, 치마 때문에 다리를 모으고 옆으로 타니까 불편한 거예요. 그래서 이탈리아의 디자이너를 불러 승마 바지를 만들어 입게 된 거죠. 태양왕 루이가 만들었다고 알려진 하이힐도 사실은 카테리나가 만든 거예요. 몸무게가 100kg이 넘던 카테리나가 키도 크고 늘씬늘씬한 프랑스 여자들처럼 되고 싶어서 만들어 신었죠.
또 메디치 가문이 어떤 사람들을 후원했는지 볼까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예술가인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에 2년 반 동안 입양돼 개인 교수로 살았고,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사실 마키아밸리가 메디치 가문을 위해 ‘군주란 이런 것입니다’라고 조언하기 위해 쓴 책이었습니다. 지동설을 밝힌 갈릴레오 갈릴레이에게 비싼 망원경을 만들어 준 것도 메디치 가문이었죠.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메디치 가문이란 백이 없었다면 교황청에 끌려가 죽었을 겁니다.
신대륙 탐험자로 알려진 아메리고 베스푸치는 메디치 가문이 경영하던 은행의 스페인 세르비아 지점 사무직원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 보고하기 위해 쓴 항해 보고서 덕분에 그의 이름에서 ‘아메리카’라는 지명이 나오게 됐죠. 예술, 과학, 정치학, 지리학 등 유럽의 다양한 문화가 메디치 가문으로부터 시작된 겁니다.

한 번 맺은 신의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
메디치 가문은 유럽 최고의 왕실 가문이었지만, 원래는 시골의 농장주에서 시작해 은행업과 모직 산업을 했습니다. 피렌체의 플로린이 유럽의 기축 통화로 사용되면서 자본주의가 태동하고 있다는 걸 알게 된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은행업에 뛰어들기 위해 모든 재산을 팔고 피렌체로 갔죠. 그 후 유럽에 인구가 조금씩 늘어나자 메디치가 사람들은 모직의 수요가 많아질 것을 예상해 모직 산업을 시작합니다. 영국, 네덜란드에서 양모를 수입한 뒤 피렌체에서 염색, 가공해 전 유럽에 판매하는 거죠. 피렌체가 패션 산업의 리더가 된 것은 메디치 가문 덕분이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은 은행과 모직 공장을 운영해 큰돈을 벌게 되지만, 돈 때문에 유럽을 지배한 것은 아니었어요. 세상을 바라보고, 다른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이 독특했죠.

‘이 손가락을 보라’라는 말로 메디치 가문의 요체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가장 마지막에 그린 그림인 ‘성 세례 요한’이 있습니다. 성 세례 요한은 예수보다 6개월 먼저 태어나서 메시아를 예언했던 사람이에요. 그래서 명작 속에 그려진 그의 손가락은 항상 예수를 가르치고 있죠.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 속에서 성 세례 요한은 오른손 검지를 하늘로 향해 세우고 있는데, 이는 메디치 가문에서 배출한 첫 번째 교황인 레오 10세와 연관이 있습니다. 레오 10세가 교황이 된 그 해에 고향 사람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로마로 불러서 성 세례 요한을 그리라고 명했다고 합니다. 이는 메디치 가문의 첫 역사와 연관돼 있어요.
나폴리 출신의 무역업을 하던 발다사레 코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볼로냐 대학에 가서 가짜 법학 박사를 산 다음, 로마에서 추기경 자리를 돈을 주고 샀어요. 로마에 살면서 당좌 수표를 끊어야 하는데, 신분이 불안정하다 보니까 모든 은행에서 계좌를 안 열어줬죠. 유일하게 메디치 은행에서 받아주면서 메디치 은행의 첫 번째 VIP 고객이 됩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 요한 23세라는 교황이 돼요. 어떻게 그가 갑자기 교황이 될 수 있었을까요.

당시 유럽은 가톨릭 교회의 대분열 시기여서 교황이 세 사람이었어요. 이탈리아에 교황이 있는데, 프랑스에서도 교황청을 만들어 교황을 세웠고, 이후 피사에서도 세 번째 교황이 만들어졌죠. 신성로마제국에서 개입해 교황 통합을 하기 위해 독일 콘스탄체에서 회의를 했는데, 웬걸 네 번째 교황이 탄생합니다. 마르틴 5세가 정식 교황이 되면서 나머지 교황을 모두 폐위시키는데, 이때 요한 23세는 불법 행위로 막대한 벌금형을 선고받고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당시 청년이던 코시모 데 메디치는 밤에 몰래 하이델베르크 성채에 들어가 갇힌 교황을 만납니다. 보석금을 빌려달라는 교황의 말에 아버지와 상의해보겠다고 하죠. 가문에서는 잔고도 없고, 담보도 없는 교황에게 대출을 해줄 수 없다고 반대했지만, 코시모는 “궁지에 몰린 우리의 고객을 어떻게 외면하느냐”며 자루에 금화를 가득 담아 갔습니다.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116억원이란 어마어마한 보석금을 내고 교황을 모시고 와 피렌체의 저택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줬어요.
요한 23세는 임종을 앞두고 “메디치가의 사람들이여, 당신들은 내가 잘됐을 때도 도와줬지만, 잘못됐을 때도 나에 대한 신의를 지켰다. 당신들에게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을 준다”며 신의를 의미하는 성 세례 요한의 손가락 조각을 줬습니다. 지금도 피렌체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박물관에 가시면 볼 수 있죠. 메디치 가문의 첫 번째 교황이 성 세례 요한의 그림을 그리라고 한 것은 메디치 가문이 어떻게 시작했는지 보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한 번 맺은 신의는 절대 버리지 않는다는 태도를 취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들을 주목하고 따르기 시작한 거죠.

김상근 교수는…


연세대학교 신과대학 교수로 그의 ‘르네상스와 창조성’ 강연은 삼성경제연구소 CEO 중 강연에서

가장 인기 있는 강의로 꼽힌다. SBS 지식 나눔 콘서트 ‘아이러브 人’의 기획에 참여해 대중성 있는 강연으로 화제가 되기도 했다. 재단법인 ‘플라톤아카데미’의 연구 책임 교수로 다양한 인문학 확산 사업을 펼치고 있다. 연세대학교를 졸업한 뒤 The USC에서 힌두교 전공으로 석사, 에모리 대학에서 신학 석사,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이후 르네상스 예술, 문학, 철학 등의 연구를 통해 유럽의 시대정신을 추적하면서 책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르네상스 창조경영』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등을 펴냈다.

 

 

 

 

 

위기의 순간에는 정면 돌파하라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위기가 닥쳤을 때는 어떻게 했을까요. 정면 돌파의 모범을 보였습니다. 산드로 보티첼리의 ‘팔라스와 켄타우로스’라는 그림을 보면, 지혜와 승리의 여신 팔라스가 반인반마의 켄타우로스의 머리채를 잡아채고 있어요. 배경을 보면 바다 위에 배가 떠 있고, 산도 그려져 있죠. 메디치 가문을 위해 일했던 보티첼리가 이 그림을 왜 그렸을까요. 1478년의 로렌초 데 메디치 암살 시도 사건과 연관이 있습니다. 동생이 대신 죽는 바람에 자신의 목숨은 지켰지만, 더 큰 위기가 닥쳤어요. 암살에 실패한 나폴리 국왕이 아예 전쟁을 선포한 거죠. 나폴리 연합군은 피렌체를 포위해 곡물 보급을 막았습니다. 피렌체 사람들은 굶어 죽기 시작했고, 흑사병이 번지게 되죠. 사람들의 원망은 커져 로렌초를 적군에게 넘겨주고 전쟁을 끝내자는 주장도 나왔습니다. 이때 로렌초는 대담한 결정을 내리죠. 밤에 몰래 배를 타고 피사로 갑니다. 도망친 것이 아니라, 피사에서 나폴리로 가는 배를 타기 위한 거였죠. 나폴리로 가는 3일 동안 그는 배 안에서 어떻게 지냈을까요. 적군을 향해 가는 내내 그는 공포심에 떠는 대신 갑판에 앉아 일광욕을 즐겼다고 합니다. 그의 대담함은 나폴리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결국 나폴리 왕은 그의 말에 설복당합니다. 보티첼리의 그림은 로렌초가 피렌체로 돌아와 전쟁이 끝났을 때 그린 거죠. 사실 위기 상황에 닥치면 피하고 싶은 게 사람의 마음입니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그 현장으로 나갔어요. 그 대담함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위기가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메디치가 사람들은 ‘인내하고 때를 기다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로렌초 데 메디치를 위해 『군주론』을 썼지만, 정작 로렌초는 일 년밖에 집권하지 못했고 젊은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기 때문에 책을 읽지 못했어요. 대신 그의 딸 카테리나가 시집을 가면서 책을 들고 갔고, 『군주론』을 읽으며 사자의 힘과 여우의 지혜를 배우게 됩니다. 카테리나는 메디치 가문의 두 번째 교황 클레멘트 7세의 후원을 받으며 프랑스 왕자 앙리 2세와 결혼을 했지만, 결혼하자마자 교황이 임종하면서 비극이 닥칩니다. 막대한 결혼 지참금을 기대했던 시아버지 프랑수아 1세는 이 기대가 빗나가자 “이 계집아이는 완전 알몸으로 내게 왔구나”라고 탄식을 했다고 합니다. 카테리나의 정치적 후광이 사라지자 남편은 프랑스 당대 최고의 미인인 디안과 바람이 납니다. 카테리나는 키가 작고, 뚱뚱한 외모를 갖고 있었거든요. 앙리 2세가 국왕으로 취임한 뒤에도 남편 곁에 있는 디안을 멀리서 바라봐야 했어요. 하인들의 멸시까지 받아야 했지만, 카테리나는 의연하게 버텨냈습니다. 카테리나는 아들을 낳기로 결심하고 당대 최고의 점성술사이자 의학 박사인 노스트라다무스를 부릅니다. 노스트라다무스의 비방을 받고, 시아버지의 힘을 얻어 남편과 합방을 한 그녀는 그 후로 열 명의 아들을 낳아서 자신의 자리를 지키죠.

그런데 노스트라다무스가 1559년, 앙리 2세의 죽음을 예언합니다. 잔뜩 겁을 먹고 몸을 사리고 있던 앙리 2세는 예언한 날이 무사히 지나자 안심하고 밖으로 나오죠. 하지만 승전보를 기념하는 마상 창 시합에서 실수로 창끝에 찔려 죽게 됩니다. 불의의 사고로 앙리 2세가 갑자기 죽자 카테리나의 아들이 왕이 되고, 그녀는 섭정 왕후가 됐죠. 피바람이 몰아칠 것을 두려워한 디안은 무릎을 꿇었고, 그동안 그녀를 업신여겼던 하인들도 벌벌 떨었습니다. 하지만 카테리나는 디안의 목을 치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나 프랑스의 섭정 왕후 카테리나는 디안, 너를 용서한다. 내 남편이 너를 사랑하였으므로 나도 너를 사랑한다.” 복수를 하는 것보다 자비로운 군주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국민의 마음을 얻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죠. 그 후부터 검은 옷을 자주 입어 ‘검은 왕비’로 불린 카테리나는 아들 세 명을 차례로 프랑스 왕으로 앉히고 영국, 스페인, 독일, 오스트리아 왕실과 사돈을 맺습니다. ‘나는 빛과 평화를 가져온다’는 좌우명을 가지고 30년간 프랑스를 통치한 그녀는 중립 정책을 쓰면서 비난도 많이 받았지만 16세기 유럽의 역사를 이끌며 사람들의 마음을 얻은 군주였어요.

 

 

 

 

메디치 가문의 운명을 좌우한 코시모 리더십
이런 위대한 가문이 왜 문을 닫게 됐을까요. 메디치 가문의 마지막 사람은 안나 마리아 데 메디치(1667~1743)입니다. 지금까지 피렌체가 풍부한 문화 예술을 통해 먹고살 수 있었던 것은 이분 때문이죠. 그녀는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 미켈란젤로의 ‘성가족’ 등 메디치 가문의 모든 보물을 한 가지 조건으로 기증했습니다. 아무리 피렌체가 가난해져도 이 물건들을 팔지 못한다는 조건이었죠. 메디치 가문이 몰락의 조짐을 보인 것은 피렌체의 대공이 됐던 코시모 1세(1519~1574) 때부터예요. 가문의 위대한 조상인 코시모를 닮고 싶어 같은 이름을 붙인 코시모 1세는 늘 신중하고 겸손했던 코시모와는 전혀 다른 리더십을 보이면서 점점 대중과 멀어졌습니다. 대공 코시모 1세는 집권한 뒤 왕정을 실시했는데, 폭동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아들이 살던 베키오 궁전과 자신이 살던 피티 궁전 사이에 비밀 통로 ‘바사리 통로’를 만들어 그곳으로만 다니기 시작합니다. 비밀 통로는 안에서는 밖이 보이지만, 밖에선 안이 안 보이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어요. 사람들을 의심하고 감시한 거죠. 심지어는 성당 뒤쪽에도 통로를 내 숨어서 미사를 보기 시작했습니다. 무절제한 생활과 폭식으로 병을 얻은 코시모 1세는 체중 조절을 위해 바사리 통로에서 걷기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개인 피트니스 센터를 만든 거죠. 운동을 할 때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가문이 갖고 있던 엄청난 작품, 조각품들을 일렬로 전시해놓고 혼자만 보게 됩니다. 예전에는 사람들에게 공개해 함께 나눴던 것을 감추기 시작하면서 메디치가는 패망의 길로 접어들게 되죠. 코시모 1세부터 3세까지 후손 코시모들이 닮고자 했던 조상 코시모는 그들과는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이탈리아의 국부로 불릴 만큼 훌륭한 사람이었죠. 그가 강조한 “대중의 시선에서 멀어져라”는 뜻은 은둔하라는 뜻이 아니라 항상 겸손하고 신중하게 처신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코시모는 피렌체 거리를 걸을 때면 항상 말을 타지 않고 걸어 다녔습니다. 말을 타면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는 이유였죠. 출장을 갈 때면 말 대신 당나귀를 애용하면서 자신을 낮췄다고 합니다. 아무리 신분이 낮은 사람이 인사를 해도 고개 숙여 같이 인사를 했고, 웃음으로 대했죠. 임종을 앞두고는 무덤을 만들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피렌체에 가면 유명인의 으리으리한 무덤들 가운데 코시모의 무덤은 찾아볼 수가 없어요. 땅바닥에 아무런 장식 없이 그냥 깔려 있을 뿐이죠. 코시모 데 메디치가 죽은 뒤 한 인문학자는 이런 추도사를 남겼다고 합니다. “오, 모든 세상 사람의 빛이여, 모든 상인의 빛나는 귀감이여, 착한 근로자들의 진실했던 친구여, 탁월함을 추구하는 피렌체인들의 명예여, 가난한 자들의 친절한 봉사자여, 고아와 과부들의 자비로운 구원자여, 토스카나 지방의 철통 같은 방패여!”
메디치 가문의 대는 끊겼지만, 가문의 정신은 여전히 숨 쉬고 있습니다. 메디치 가문이 그랬던 것처럼 한 번 맺은 인연은 버리지 말고, 위기에는 정면 돌파하며, 카테리나처럼 인내하고, 당나귀를 타고 가던 코시모처럼 겸손한 삶을 사시기를 바랍니다.

 

 

피렌체로 떠나는 인문학 여행
김상근 교수가 ‘여성중앙 인문학 아카데미’ 주제로 피렌체 이야기를 선택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다. ‘생각하는 사람의 고향’이라 불리는 피렌체는 중세의 암흑을 걷어내고 인문주의 운동이 시작된, 인문학의 고향이기 때문. 인문학의 고향을 만들어낸 메디치 가문의 흥망성쇄 이야기는 드라마틱했다. 김상근 교수는 메디치 가문이 후원했던 예술가들의 작품과 피렌체의 거리, 성당 등 직접 찍어 온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야기의 생생함을 더했다. 서울 아현동에서 온 신정미씨는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를 여행하는 기분이 들 정도로 재밌었다”며 웃었다. 논현동의 김경아씨는 “메디치 가문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했는데, 이번 강연을 통해 피렌체에 흠뻑 빠지게 됐다”“카테리나처럼 위기를 극복하고, 로렌초처럼 겸손한 사람으로 아이를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소감을 남겼다.

기획 / 지희진 기자 사진 / 이민희(studio lamp) 촬영협조 / 김상근/ 자세한 내용은 여성중앙 10월 호에서 만나보실 수 있습니다

 

 

 

 

 

강연후기

[人]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김상근교수 1

배우는 창조경영 리더십_김상근 연세대 교수

아카데미후기 * 김상근교수님이 들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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